1795년 정조는 6천여 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7박 8일의 일정으로 수원화성에 행차했다. 또한 그 해는 혜경궁홍씨와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년이기도 하며, 정조가 즉위한지 20년째가 되는 특별한 해였다. 정조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무려 2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했다. 아버지의 묘소를 전배하고,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열면서, 양반과 노인 및 일반 백성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도 베풀어 왕실의 경사를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하고자 했다.
화려했던 을묘년 수원행차는 《화성행행도》와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고스란히 담겨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1795년(정조 19) 윤2월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홍씨와 함께 수원에 행차하고 현륭원을 참배한 전 과정을 정리하여 1796년 총 10권 8책으로 간행한 책이다. 『원행(임금이 현륭원에 행차함)을묘(1795년)정리(정리소에서 제작)의궤(국가공식기록)』는 한층 정비된 의궤 체제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화성성역의궤』와 함께 조선시대 의궤의 가장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수준 높은 책이다.
▲ 화성원행반차도

정조는 재임기간 아버지가 묻혀있는 화성 현륭원을 13차례 행차했다. 1795년 을묘년 수원행차는 그 동안 이용하던 과천을 경유하는 길이 아니라 새로 만든 시흥길을 이용했다. 1789년부터 이용한 과천길은 남태령 등 고갯길이 많았다. 연로한 어머니가 그 길을 이용하기에는 불편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행차에 8일(음력 윤2월 9일∼16일, 양력 3월 29일∼4월 5일)이나 소요된 조선 최대 규모의 행차이며 축제였다.

▲ 화성원행반차도

1795년 윤2월 9일 새벽,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홍씨를 모시고 창덕궁을 출발했다.

능행차 안전과 무사복귀를 비는 출궁의식으로 막이 올랐다. 경기감사 서유방이 선두로 나아갔다. 총리대신 채제공이 무리를 이끌고, 어보마(국새를 실은 말), 정가교(왕의 가마), 둑(군 통수권을 상징), 용기(왕을 상징하는 기)가 뒤를 따랐다. 이어 혜경궁홍씨가 탄 가마 자궁가교가 나아갔다. 그 뒤에 말을 탄 정조와 정조의 누이 청연군주와 청선군주가 뒤를 따랐다. (※화성원행반차도)

행차는 종묘와 숭례문을 지나 한강변 배다리에 도착했다. 작은 흐트러짐도 없이 한강을 건너는 국왕의 행렬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노량행궁(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들은 뒤 시흥행궁〈현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 사거리 근처〉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었다.

◉수원화성 행차를 위한 배다리 설치 및 시흥행궁 건립

창덕궁에서 수원화성까지의 이동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한강이었다. 정조는 1789년 배다리 건설 담당 관청인 〈주교사〉를 설치하고 가장 합리적으로 배다리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한 결과 36척의 교배선과 12척의 좌우위호선을 이용하여 배다리를 설치, 한강을 건너는 획기적인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36척의 배를 이용, 가장 큰 배를 가운데 두고 물가로 갈수록 작은 배를 두었다. 배들을 단단한 나무로 2중·3중 서로 엮고 그 위로 횡판을 덮고 잔디를 깔았다. 강가에는 선창다리를 만들어 물결에 따라 높낮이가 조절되도록 하였다. 다리 양쪽에 난간 240척을 설치하고 깃발을 세우고 다리 위에는 3개의 홍살문을 세워 한껏 권위를 높였다. 이번 원행 시 2월 13일부터 24일까지 배다리를 설치하고 다음 달 윤2월 4일에 배다리를 건너는 연습도 시행하였다. 또한 정조는 수원화성 행차를 위해 특별히 기존의 좁고 험한 과천로 대신 시흥을 거쳐오는 평탄한 길을 새로 닦고, 중간 숙소로 114칸에 이르는 시흥행궁을 지었다.

둘째 날(윤2월 10일) 새벽, 시흥행궁을 출발한 어가는 빗길을 재촉했다,

만안교 건너 안양점〈현 안양시 안양역 근처〉에서 휴식을 취한 후 사근평행궁〈현 의왕시 고천동 주민자치센터〉에 도착, 점심을 들었다.

미륵현(지지대고개)에서 휴식을 취한 후 노송지대〈현수원시 이목동〉를 지나 진목정〈현 만석공원〉을 거쳐 장안문을 통과, 저녁 무렵에 화성행궁에 도착했다.

화성성묘전배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셋째 날(윤2월 11일) 아침, 수원에서의 첫 행사로 정조는 화성 향교에서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에 나가 전배했다. (※화성성묘전배도)

 

 

 

 

 

 

 

낙남헌방방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향교 전배 후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문무과 특별시험을 실시하고, 낙남헌에서 합격자를 발표하고 시상하였다.(※낙남헌방방도)

넷째 날(윤2월 12일) 새벽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가 묻혀있는 현륭원을 전배했다.

서장대야조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이어 정조는 오후 4시경에 행궁을 나와 황금갑주를 갖춰 입고서 팔달산 정상부에 있는 서장대에 올라 군사훈련을 진두 지휘했다.  오후와 야간 두 차례에 걸쳐 군사훈련을 하였다. 당시 수원화성에는 장용외영 군사 5천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군사훈련에는 3700여 명의 군사와 400여 필의 말이 동원되어 삼경(23시~1시)까지 진행되었다. 서장대의 군사훈련은 정조가 오랫동안 양성한 친위부대의 군사적 위력과 신하들에게 왕권을 과시하는 훈련이었다. (※서장대야조도)

 

봉수당진찬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다섯째 날(윤2월 13일)은 회갑잔치 날이다.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아침부터 하루 종일 혜경궁에게 올리는 연회가 베풀어졌다. 정조는 손을 모아 이마에 대고 "천세(千歲)!"를 외치는 산호(山呼)를 하고 어머니에게 술잔을 올려 만수무강을 빌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술잔은 정조가 올렸다. 세 번째 술잔부터 일곱 번째 술잔까지는 혜경궁의 명령에 따라 명부(命婦)와 영의정홍낙성, 광은부위김기성이 올렸다. 술잔을 올릴 때마다 서로 다른 정재(呈才)가 공연되어 잔치의 위용을 더했고 '취하지 않는 자 돌아갈 수 없다'(不醉無歸)며 정조는 신하들과 술잔을 주고받았다. (※봉수당진찬도)

여섯째 날(윤2월 14일) 새벽에 정조는 화성행궁 신풍루에서 사민(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노인)에게 쌀을 나눠주고 기민(굶주린 백성)에게 죽을 제공하는 등 생활이 어려운 화성주민에게 시혜를 베풀었다. 이때 소요된 재원은 임금의 개인 재산인 내탕금(內帑金)을 사용했다.

▲ 낙남헌양로연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진시(7시~9시)에는 낙남헌에서 화성부 노인 384명을 모시고 영의정 홍낙성을 비롯한 관원 15명이 참석한 가운데 양로연을 열었다. 정조는 이 자리에서 노인들에게 지팡이와 노란 비단 수건을 선물하였다. (※낙남헌양로연도)

오시(11시~13시)에는 방화수류정 등 수원화성을 시찰하였다.

 

 

 

▲ 득중정어사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신시(15시~17시)에 정조는 득중정에 나아가 활쏘기와 불꽃놀이를 즐겼다. 혜경궁도 득중정 아래 자리를 잡고 불꽃놀이 행사에 참석하였다. 정조는 낙남헌 안에서 을묘년 수원행차의 마지막 밤을 매화포 불꽃을 구경하러 온 백성들과 함께 보면서 즐겼다. (※득중정어사도)

 

 

▲ 환어행렬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일곱째 날(윤2월 15일) 공식일정을 모두 끝낸 어가행렬은 환궁 길에 올랐다. 화성행궁을 출발, 진목정교에서 휴식을 갖고, 사근평행궁에서 점심을 들었다. 사근평행궁에서 정조는 광주부윤, 시흥현령, 과천현감을 불러 각 고을의 문제점과 백성들의 어려움을 물었다. 안양점에서 휴식을 갖고, 시흥행궁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었다. (※환어행렬도),

 

 

 

▲ 한강주교환어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마지막 여덟째 날(윤2월 16일) 아침 일찍 시흥행궁을 출발했다. 문성동에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듣고 시혜를 베풀었다. 번대방평〈현재 서울시 대방동〉에서 휴식을 취하고 노량행궁에서 점심을 들고 배다리를 건너 창덕궁으로 환궁함으로써 을묘년 수원행차의 대단원이 마무리 되었다. (※한강주교환어도)

을묘년 8일간의 수원행차는 그렇게 끝났다.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잔치를 베풀면서 동갑이신 아버지 사도세자께 못 다한 효를 다하고자 한 지극한 효심과 지역 인재 등용과 다양한 구휼활동 등을 통해 왕실의 잔치를 넘어 왕과 신하와 백성이 모두 함께(與民同樂)하는 행복한 축제였고 행행(行幸)이었다. 정조의 능행차는 '옛 것을 모범으로 새 것을 창출(法古創新)'하는 정신으로 수원화성을 건설, 근대로의 꿈을 펼쳤던 행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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