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반

     
 

2016년 수원시광교노인복지관 문화예술교육 활동은 사진 사업에 참여하여 이론에서 배운 내용을 실전에 적용해 봄으로써 수업 내용의 이해력을 높이고 실전기술능력을 향상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오늘은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1번지인 인사동소재 소갤러리(갤러리나우, 인사아트쎈터, 국제갤러리) 및 종묘를 중심으로 사진도 찍고,산책도 하고 체험도 해볼 계획이다.

지독하게 삶아대던 더위도 주춤하고 한발짝 물러섰다. 30~40년을 가족과 나라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지금은 인생후반기를 열심히 살아가는 수원광교노인복지관 사진반 어르신들 20여명이 서울 나들이를 떠나는 날이다. 수원광교노인복지관 앞에 파란유니폼과 잘 어울리는 노랑 관광버스가 한대 대기해있고 출입문에서는 우리의 예뿐 딸이자 손녀인 김경미 사회복지사가 과일, 음료 과자 등을 환한 웃음과 함께 어르신께 나눠 드린다. 준비를 마치고 안전벨트를 확인하자, 버스는 혼잡한 도심을 서서히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린다.

골목길을 몇군데 돌아 버스는 인사동입구에 도착한다. 버스에서 내려 강사님과 총무님으로부터 오늘의 일정과 주의사항을 들으며, 잊어버리지 말고 앞사람 놓치지 말라는 총무님의 간곡한 주의 말씀을 뒤로한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인사동 골목으로 흩어져 들어갔다.

인사동 이라는 명칭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처음 사용되었다. 현재의 인사동 지역에는 조선 초기에 한성부 중부 관인방(寬仁坊)과 견평방(堅平坊)이 있었고(방(坊)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도의 행정구역 명칭의 하나로 성안의 일정한 구획을 말함), 1894년 갑오개혁 당시에 이루어진 행정개혁 때는 대사동(大寺洞), 원동(園洞), 승동(承洞), 이문동(李門洞), 향정동(香井洞), 수전동(水典洞) 등이 있었다. 관인방과 대사동에서 가운데 글자 인(仁)과 사(寺)를 각각 따서 인사동이라는 동명이 붙여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사동(댓절골)이라는 명칭은 이 지역에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라는 큰 절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원각사라는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또한 인사동은 북쪽의 북악산과 남쪽의 청계천 사이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에는 삼청동에서 시작해서 관훈동·인사동을 거쳐 청계천과 만나는 광통교까지 흐르는 개천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졌다. 현재의 인사동 길은 이 개천을 따라 형성되었다. 인사동 길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63번지에서 관훈동 136번지로 이어지며 700m의 비교적 좁은 길이다.

조선왕조를 건립한 태조 때부터 국가나 왕실에 공을 세운 사람을 공신으로 책록(冊祿)하기 위해서 그 업적을 조사하던 관청인 충훈부(忠勳府)가 관훈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도적을 경비하고 법에 금한 사치스런 잔치나 풍기문란 등을 단속하던 이문(里門)이란 관청과 도화서(圖畵署)가 인사동에 있었다. 인사동은 관가이면서 동시에 거주지였다. 중인(中人)들이 많이 산 것으로 전해지지만, 이율곡(李栗谷), 이완(李浣) 장군, 조광조(趙光祖) 등도 이곳에서 살았다.

일제강점기부터 골동품 상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이들 상점들은 문화재 수탈의 창구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인사동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는 1919년 3월 1일의 독립운동을 들 수 있다. 당시 33인이 모였던 태화관 자리에는 태화빌딩이 자리 잡고 있다.

해방 후 1970년대에 들어와 화랑, 표구점 등의 미술품 관련 상점들이 이곳으로 집중되면서 인사동은 현재와 비슷한 문화의 거리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서울시에서는 1988년에 인사동을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하였고 2002년 4월 24일에는 제1호 문화지구로 지정했다.

인사동은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문화의 거리이다. 여기에는 골동품 상점, 화랑, 표구방, 필방, 전통공예품 상점 등이 집중되어 있고, 전통찻집·전통주점·전통음식점이 번성하고 있다. 인사동은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의 하나이다. 인사동을 찾는 관광객이 많아 상주인구보다 유동인구가 훨씬 더 많다. 법정동 인사동에는 종로1·2·3·4 행정동이 있는데 이들 4개 행정동의 2009년 인구는 4,437가구에 8,645명인데 비하여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하루에 1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내외 관광객의 보행 편의와 원활한 문화행사 개최를 위해 주말인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인사동 거리를 ‘차 없는 거리’를 운영하고 있다.

종묘(宗廟)는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뒤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하고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유교는 초월적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이다. 유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사람은 영혼인 혼(魂)과 육신인 백(魄)이 결합된 존재이고, 죽음이란 혼과 백이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며 백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죽은 조상의 혼을 모시는 묘(廟)를 세우고 백(시신)을 땅에 모시는 묘(墓)를 만들어 조상을 숭배하도록 했다. 이런 기본적인 사유 방식을 바탕으로 일반 백성이나 사대부의 조상신은 물론이고 인격화한 국가라 할 수 있는 국왕의 조상신은 중요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 왕조의 개국공신인 정도전도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임금은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를 열면 반드시 종묘를 세운 다음 조상을 받드는 법이다. 이것은 자신의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것이니 후한 도리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종묘는 왕실 조상의 혼을 신주(神主)로 받들어 국가적인 제례를 올리며 왕권의 존엄성을 내외에 과시하고 왕조의 근간을 확립하였던, 숭고하고 상징적인 유교적 공간이며 최고의 사당 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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