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 답사, 창성사(지)를 찾아서(1) -절터약수터

▲ 절터 약수터

매향동 방화수류정 부근, 당집 모양의 작은 건물 한 채가 길가에 외롭게 서 있습니다. 틈 사이로 들여다보니 오래된 비석입니다.

이 비는 수원시가 보유한 보물 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 1965년 광교산에서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보물 제14호 창성사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이하 진각국사비)'입니다.

그럼 이 비는 광교산 자락 어디에 있었을까요? 탑비와 관련해 의문을 푸는 열쇠는 창성사(彰聖社)

입니다. 탑비의 명칭에 '창성사(彰聖社)'라는 사찰명이 들어가 있고 '이 비는 창성사(彰聖社) 경내에 세웠다'는 내용이 비문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 절터 약수터 3단 기단으로 조성된 절터 축대

지난 18일, 광교산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창성사(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이들은 여러 가지 자료 조사를 통해 광교산에서 창성사(지)라 칭할 수 있는 곳을 세 곳(① 상광교동 산16번지 (절터약수터). ② 상광교동 산41번지 (현 창성사지 지정). ③ 상광교동 50종 부근 (창성사 부근 사지)으로 압축하고 그 첫 번째 답사지로 잘터약수터를 선정했습니다.

상광교동 산16번지는 절터약수터라 부르는 곳입니다. 광교산에 있는 절터 중에서 비교적 높은 지점인 고도 394m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전망도 좋습니다.

절터약수터는 송신탑 계곡 사이에 최소 세 개 층 이상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습니다. 이런 규모는 광교산에서 13번 버스종점 사지(창성사 주변)와 서봉사지 다음 가는 사찰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물까지 풍부해 주목 받는 장소입니다.

▲ 절터 약수터 인근에서 발견된 탑의 부재

그런데 이런 큰 사찰이 어떻게 이름은 사라지고 그냥 절터로 불리게 됐을까요? 샘물(약수터) 또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인데도 특색 없이 절터약수터로 부르게 됐을까요?

정확히 말하면, 이름이 없던 곳은 아닙니다. 최소 1990년도 말 이전까지 창성사지 혹은 창성사터로 불렸으며 표시판까지 설치돼 있었던 곳입니다. 물론 약수터는 창성사약수터, 창성사터약수터라 불렀습니다.

현장을 잘 아는 분은 "이곳에 창성사지 표시판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훼손해서 벌금까지 물었던 일도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 절터 약수터 인근의 용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팔각형 석물

`창성사`가 광교산의 대표적 사찰이었으며 중추적 역할을 했던 곳이었기에 최소 90년도 말까지 이곳이 창성사지로 불렸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절터(약수터)가 창성사지로 지정되고 표시판까지 세웠는지 지정 이유와 근거가 분명할텐데 알려진 바 없습니다.

약수터 또한 창성사약수터, 창성사터약수터로 불리며 신문에도 두 차례 등장하는데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풀어야 할 숙제며 후손을 위해 정확한 기록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 절터 약수터 인근의 석물

절터(약수터)가 창성사지가 맞나?

절터 풍경은 약수터가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나무 의자가 양쪽으로 길게 놓여있습니다. 절을 바라보고 좌측으로는 운동기구가 우측 끝단에는 공중화장실이 있습니다.

운동기구가 있는 쪽으로 돌아가 절터의 모습을 가늠해 봤습니다. 허물어져 있긴 했지만 기단으로 보이는 석축이 남아있었고 부도탑 상층부로 보이는 석물도 기단 끝부분에 걸터 앉아 있었습니다.

▲ 절터 약수터 인근의 석물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탑신으로 보이는 팔각형 석물과 부재들이 널려 있고 반대편 끝 부분에는 팔각형 기둥 모양의 석물과 용도를 알 수 없는 석물 조각들도 흩어져 있었습니다. 좀 더 찾아보면 흥미로운 것들이 많이 있겠지만 잡풀과 가시넝쿨로 인해 쉽지 않았고 함부로 현장을 훼손할 수도 없어 그 정도의 흔적만을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절터약수터를 조사한 전문자료가 없고 기록도 부족했기에 진각국사비가 이곳에 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어려웠습니다.

▲ 절터 약수터 인근의 석물

참고1: 이번 답사는 ‘역사문화의 보고 광교산’이라는 주제로 관심있는 분들이 함께 한 답사였습니다.

참고2: 절터약수터는 한 때 창성사지로 불렸으며 현재는 미약사지, 미학사지로 불리는데 왜 그런지 자료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진각국사비가 어디에 있었는지 또한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답사 참여자(가나다순) : 김낭자.김봉집.김영기.김진원.노중태.서정일.안숙.유은서.이흥우.장신홍.황석진 11명.

 

▲ 수원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는 미학사지 석등부재

다음 기록은 '수원 지명총람'에서 인용하였슴.

(전설 또는 구전에 의거 미약 절터, 미학 절터로 추정했다는 내용임)

●미약 절터, 미학 절터, 절터 약수터

미약 절터는 수원 시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등산로의 억새밭(갈대밭)에 못 미쳐 있는 옛 절터로 돌붓골의 윗 지역이다.

이 곳 약수는 맛이 아주 좋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어 수원 광교산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상광교동 시내 버스 종점에서 사방댐을 지나 왼쪽의 등산로를 따라 돌붓골을 거쳐 이 곳에 이르면 숨이 턱에 닿게 되는데, 땀을 닦고 숨을 고르면서 이 곳에서 흘러나오는 시원하고 청정한 샘물을 마시는 기분은 그야말로 천하를 모두 얻은 기분이다.

이 곳은 얼마 전까지 창성사지라는 안내판이 서 있어서 창성사터로 잘 못 알려져 있었으나, 향토사학자들과 언론의 노력으로 수원시에서 다시 제자리를 찾아줘 원래의 미약 절터라는 이름을 찾게 됐다.

미약 절터는 비구니(여승)들만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이 곳에서 수도하고 있던 어느 여승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학이 내려와 여승의 몸에 잉태를 하게 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따라서 아름다운 학이 내려와 아들을 낳게 했다고 해서 미학(美鶴)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것이다.

한편 미약 절터에는 지금도 3단 기단으로 조성된 고려 시대 전형적인 절터 축대가 남아 있으며 탑의 좌대인 것으로 보이는 연화 무늬의 돌받침과 기와, 주춧돌 등이 남아 있으며 절터 역시 커서 당시엔 창성사와 더불어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더 훼손되기 전에 창성사지와 더불어 간단한 지표 조사라도 해서 뒷날의 복원에 대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곳은 '미약 절터', '미학 절터'와 더불어 약수터가 있으므로 시민들이 그냥 '절터 약수터' 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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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터 약수터를 찿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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