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황교(大皇橋) 표석이 있었던 위치는?

▲ 대황교(일제강점기, 출처: 한국사진작가협회 수원지부 출간물)

조선시대(朝鮮時代) 『수원군읍지(水原郡邑誌)』‘정조의 필로[正祖의 蹕路, 임금의 나들이 길]’에 대황교(大皇橋) 표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대황교(일제강점기, 출처: 수원의 지명과 도로명 총람)

대황교(大皇橋)는 옹봉에서 백여 보 떨어져 있고, 길 서쪽에 대황교(大皇橋)란 표석을 세웠다. 처음 이름은 황교(黃橋)였고, 을묘년(1795년)에 대황교로 고친 것이다.
작은 정자가 있었다.

▲ 대황교(1960년대,출처: 수원의 지명과 도로명 총람)

또한 ‘대황교(大皇橋)’는 임금님이 건너다니는 길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 이름으로 해서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당시 중국에서는 속국이라고 생각한 조그마한 나라에서 어떻게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이름을 허락도 없이 사용할 수 있느냐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 즈음 우리나라에서는 사신을 파견하게 되었는데 이 사신은 상복으로 채비를 하고 길을 떠났다. 중국에 도착하니 마침 대비가 죽어 상중이었다. 창졸간에 당한 상(喪)인데도 상복을 제대로 차려 입고 들어가자 중국에서는 그 선견지명에 놀라 대황교의 명칭에 관해서는 묻지도 않았다. 그래서 사신으로 갔던 목적을 달성하고 다리 이름은 그대로 지속하게 되었다.

현재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에 있는 대황교동[Daehwanggyo-dong, 待皇橋洞]은 조선시대 수원부 안녕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황교와 간촌을 합하여 대황교리라 하고 수원군 안용면에 편입되었다.
1949년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될 때 안용면이 화성군에 편입되었으며, 1963년 수원시 곡선동에 편입되어 대황교동이라고 개칭되었다. 1988년 구제(區制) 실시로 권선구 관할이 되었다.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곡선동에서 관할한다.
대황교동은 마을에 있는 다리인 대황교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 현재 정조로에 놓여져 있는 대황교

★ 현재 정조로에 놓여져 있는 대황교(大皇橋)
세류역(하유천 표석)에서 1.3Km 내려가면 ‘장다리천’을 건너는 ‘장다리천교’고가가 나온다. 장다리천교로부터 약 400m 구간은 4차선 도로로 넓혀 놓았고 그 중간 200m 지점부터 동수원로 400m까지 ‘대황교 입체화 지하차도’가 있다. ‘장다리천교’에서 약 900m 내려가면 ‘대황교’가 보인다.
현재의 ‘대황교’는 콘크리트 다리로 총길이 75m, 너비 10m, 교각 수 3개(5칸), 1985년도에 준공된 다리이다. 오른쪽에는 약 80m 거리를 두고 경부선 철도가 곧게 뻗어있고, 왼쪽으로는 약 100m 거리를 두고 나란히 달리는 ‘비상활주로’ 겸 ‘경기대로’가 있다. 서쪽으로는 황구지천(黃口池川)의 황계교(皇鷄橋)를 건너면 화성시 황계동 ‘새터 말’, 송죽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다.

▲ 신대황교(황구지천 위에 황계교와 나란히 세워져 있음)

★ 현재 황계교와 같은 방향으로 놓여져 있는 신대황교는 어떤 다리인가?
현재의 ‘대황교’로부터 ‘정조로’를 따라 아래 약 130m 근방 지점에서 우회전 하여 황계동 입구 지하차도와 보도를 통해 가면 황구지천 위에 ‘황계교(黃鷄橋)’ 다리가 놓여져 있다.
근래에 비로소 다리를 놓고 차량이 화성시 황계동 출입을 시작한 콘크리트 다리이다.
이 황계교 옆 약 10m 북쪽에 같은 방향으로 ‘신대황교’가 놓여 있다.
황계교 북쪽 편에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신대황교가 놓여져 있는지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이 신대황교는 수원공군비행장에서 사용하고 있고 민간인 출입은 통제되어 있어 언제 누가 어떤 용도로 이 다리를 세웠는지 확인이 어렵다.

▲ 융능에 있는 원대황교

★ 원대황교(原大皇橋), 융릉 융릉교로 재현되어 현존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던 수원공군비행장의 확장 공사로 1970년대에 대황교동에서 곡반정동 등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주민들의 노력으로 다행히 이 돌다리를 모두 옮겨 융·건능의 융릉(隆陵) 금천교 자리 바로 입구에 다시 융릉교[隆陵橋, 원대황교(原大皇橋)]를 놓음으로서 본연의 형태를 일부나마 재현하게 되어 현존할 수 있게 되었다.

★ 대황교 원래 위치를 찾아서

​'화성지'와 '수원군읍지'​ 필로에는 "하유천(下柳川), 황교(皇橋), 옹봉(甕峯), 대황교(大皇橋)“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17(‘標’, ‘長’). 하유천(下柳川)
* 이로부터 아래로는 옛 필로이다.건장동으로부터 5 리이다.
길 동편에 표석이 있다.‘下柳川(하류천)’이라 새겼다. 장정(長亭, 긴 정자)이 있다.
18(‘標’). 황교(皇橋)
* 하류천으로부터 100여보이다. 길 동편에 표석이 있다.
‘皇橋(황교)’라 새겼다.처음 이름은 소황교(小皇橋)이다.
을묘(1795)년에 고쳐서 명명(命名)하였다.
19(‘標’). 옹봉(甕峯)
* 황교로부터 100여 보이다. 길 서편에 표석이 있다.
‘甕峯(옹봉)’이라 새겼다. 처음 이름은 독봉(독봉)이다.
을묘년에 고쳐서 명명(命名)하였다. 건장동으로부터 통합해서 5 리이다.
장승(長栍)을 세웠다.
20(‘標’). 대황교(大皇橋)
* 옹봉으로부터 100여 보이다. 길 서편에 표석이 있다.
‘大皇橋(대황교)’라 새겼다. 처음 이름은 황교이다.
을묘년에 고쳐서 명명(命名)하였다. 단정(短亭)이 있다.

▲ 네이버지도 상 대황교 추정 위치

하류천에서→100여 보 거리에 황교→100여 보 거리에 옹봉→ 100여 보 거리에 대황교가 있었다.

'대황교'에는 의미있는 사연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정조가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다니던 길, 즉 수원부에서 윗 버드내, 아래 버드내를 지나 더 내려가면 황구지천(黃口池川)을 이루는 두 줄기 지류가 한데 모여지는 곳에 돌다리로 된 ‘대황교’가 있었다. 원래 이 다리는 얕게 놓아져 있었는데, 당시 삼남 지방(三南地方)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대황교’가 있는 이 길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번잡한 ‘1번 국도(國道)’이다. 그래서 그 옆에 크게 다리를 놓은 뒤로 돌다리 ‘대황교’는 쓸모없는 다리가 되었다. 그 때부터 비바람에 허물어지고 수해를 입어 그 유명한 다리가 몹시 흉하게 되었다.‘고「수원의 지명과 도로명 총람」에 기록되어 있다.

※ 위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대황교, 옹봉, 황교의 위치는 직선거리를 기준하였으며, 필로의 방향에 따라 다소 오차가 발생할 수 있음.

※ 위 네이버 지도상 거리 산정에 있어 100보(步)는 1리(里), 즉 476.747m(출처: e수원뉴스 「정조시대의 1리(里)는 476m였다.」 작성자 시민기자 한정규)로 산정하여 필로를 그려보았다.

여기서 원래의 대황교 옆에 큰 다리를 놓았다고 했는데 그 다리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수원시광역행정협의회 이재훈 사무국장은 어릴 적(1960년대 무렵)에 대황교 부근에서 헤엄치며 놀기도 했으며, 이 큰 다리가 실제 수원공군비행장 내에 있으며 수개월 전에 비행장 이전과 관련 비행장에 들렸는데 이 때 이 다리를 건너갔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대황교(大皇橋)는 황구지천 위에, 황교(皇橋)는 수원천 위에 놓인 다리로 추정된다.

※「수원의 지명과 도로명 총람」등에서 대황교(大皇橋)·대황교동(大皇橋洞) 이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수원군읍지』의 ‘필로(蹕路)’에 따르면 황교(皇橋)는 화성 유수부 남쪽 15리 안녕면 하유천에서 백여 보 떨어진 길 동편에 황교라고 새긴 표석이 있다고 하였다. 처음 이름은 소황교(小皇橋)였는데, 1795년(정조 19) 대황교(大皇橋)로 고쳤다. 조그만 정자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상기 내용은 '수원군읍지'의 기록과는 다른데, 번역을 잘못한 것으로 보인다.

'화성지'와 '수원군읍지'​에는, "황교(皇橋), 옹봉(甕峯), 대황교(大皇橋)“ 순으로 기록을 하고 있으며,
황교(皇橋)는 하유천에서 백여 보 떨어져 있고, 길 동쪽에 황교(皇橋)란 표석을 세웠다. 처음 이름은 소황교(小皇橋)였고, 을묘년(1795년)에 황교(皇橋)로 고친 것이다.
대황교(大皇橋)는 옹봉에서 백여 보 떨어져 있고, 길 서쪽에 대황교(大皇橋)란 표석을 세웠다. 처음 이름은 황교(黃橋)였고, 을묘년(1795년)에 대황교(大皇橋)로 고친 것이다. 작은 정자가 있었다.

즉 두개의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는 얘기다.
소황교(小皇橋)는 --> 황교(皇橋)로, 
황교(黃橋)는 --> 대황교(大皇橋)로 고쳤다는 것이다.

따라서「수원의 지명과 도로명 총람」등에서 대황교(大皇橋)·대황교동(大皇橋洞) 이야기의 내용을 ‘수원군읍지’의 기록과 동일하게 표기되도록 다음과 같이 수정할 필요가 있다.
* 『수원군읍지』의 ‘필로(蹕路)’에 따르면 대황교(大皇橋)는 옹봉에서 백여 보 떨어져 있고, 길 서쪽에 대황교(大皇橋)란 표석을 세웠다. 처음 이름은 황교(黃橋)였고, 1795년(정조 19)에 대황교(大皇橋)로 고쳤다. 조그만 정자도 있었다고 한다.

▲ 장다리천교’고가와 교차하는 ‘대황교 입체화 지하차도’ 입구의 안내팻말
▲ ‘장다리천교’고가와 교차하는 ‘대황교 입체화 지하차도’ 입구 부근에 세워져 있는 안내팻말

아울러 ‘장다리천교’고가와 교차하는 ‘대황교 입체화 지하차도’ 입구 부근에 수원 팔색길 관련 ‘대황교 이야기’ 라는 안내팻말이 있다. 그 내용의 오류 부분 또한 수정해야 한다.

▲ 괴목정교와 만석거에 세워져 있는 안내팻말

또한 효행길 관련 안내팻말(괴목정교표석과 만석거표석에 세워져 있는 팻말)의 내용에는 오류가 너무 많다.
※ 오류 내용 부분
1. 상단에 18개의 표석을 세웠다고 표기되어 있는데 하단(최초 설치하였던 위치)의 표석 수는 19개 임.
2. 상단에 하류천에 표석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하단에는 ‘17. 하류천(下柳川)장승’으로만 표기되어 있음. ‘17. 하류천(下柳川)표석’으로 수정요망.
3.「수원군읍지」에는 지지대고개 한문을 遲遲峴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표석과 장승을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4.「수원군읍지」에는 장안문, 행궁, 팔달문에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는 기록이 없음.
5.「수원군읍지」에는 재간현(才榦峴)에 장승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음.
* 필로 순서 상 만화현 다음에 추가하면 됨.

이 팻말 또한 수원군읍지 기록에 맞게 수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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