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달 기나 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 님 오신 날 밤이어드란 구뷔구뷔 펴리라

이 시조는 예술과 사랑, 자유을 추구한 조선의 여인 황진이가 선전관이었던 이사종을 사랑하여 읊었다.

한양 제일의 소리꾼이라는 이사종과 황진이와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두 사람은 거칠 것 없이 송도를 떠나 6년간 조선 팔도를 유람하며 한양과 송악에서 남녀 간의 사랑을 초월한 예술 동지이자 영혼의 동반자로 인생을 함께 나눴다.

연인과의 사랑을 바탕으로 시를 지을 때면 조선 최고의 시인이 되었다. 이 시조는 틀에 박힌 한이나 아픔에서 초월하여고 겨울밤의 고독을 따뜻한 봄밤의 만남의 환희로 전이하고 있다.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이별의 한이나 아픔은 말할 것도 없고  시간 관념 마저도 능히 초월한 데서 멋을 보여준 작품이다.

밤의 한 가운데를 허리라고 한 것도 특이한 착상이거니와 물질이 아닌 시간을 나무 등걸이나 꽃을 잘라내듯이 버혀(베어)낸다고 한 것은 황진이 만의 가능한 착상이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베어낸 긴 밤의 한토막을 서리서리 넣는다고 한 것은 무엇일까, 사실 지난번  님이 오신 밤은 야속하리만큼 짧았으리라. 회포의 일단을 다 풀기 전에 날이 밝아오는 것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하지만 님이 없는 고독한 이 밤은 너무나 지루하고 길다. 그러니 남아 돌아가는 동짓달 밤을 잘라내어 님이 오신날 밤의 짧은 시간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보관해 두자는 것이다. 엉키었던 물건을 잘 손질 하듯이 서리서리 서려서 말이다. 그랬다가 님이 오신 밤이면 그것을 굽이굽이 펴서 날이 더디 새게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서리서리 넣을 때의 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찬 시름겨웠던 마음과는 대조적으로 흥에 넘쳐 춤이라도 출듯이 밤의 한토막을 풀어서 잇는 동작에 님과의 재회를 꿈꾸며 이미 즐거움으로 신명이 나 있는 것이다

황진이(黃眞伊) 일명 진랑(眞娘). 기명은 명월(明月). 개성 출신. 조선 중종 때 진의 서녀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을 읽고 시·서·음률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자 기계(妓界)에 투신, 문인(文人) 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켰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를 맺었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와 깊은 애정을 나누며 난숙한 시작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을 표현했다.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로 불렸다.

이별 없는 사랑이 없다지만, 잦은 이별은 그녀의 마음을 멍들게 했을까. 소세양과의 30일간의 사랑은 참으로 애틋하다. 황진이와 사랑을 나눈 소세양은 중종 4년에 등과하여 시문에 능했고, 벼슬이 대제학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소세양은 젊어서부터 여색을 밝혔다고 전한다. 송도의 명기 황진이가 절세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소세양은 “황진이가 절색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녀와 30일만 함께 하고 깨끗하게 헤어질 것이다. 만약 하루라도 더 머물게 된다면 너희들이 나를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좋다.” 황진이를 만난 소세양은 30일의 약속으로 동거에 들어갔다. 마침내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자 소세양은 황진이와 함께 이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황진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시 한수를 소세양에게 써주었다. 그녀의 시 한수는 소세양의 마음을 움직였고, 친구들은 약속을 어긴 소세양을 인간이 아니라고 놀렸다 한다.

소세양과의 이별을 맞이하며
달빛 아래 뜰에는 오동잎 모두 지고
찬서리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다락은 높아 높아 하늘만큼 닿았는데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흐르는 물소리는 차기가 비파소리
피리에 감겨드는 그윽한 매화향기
내일 아침 눈물 지며 이별하고 나면
님그린 연모의 정 길고 긴 물거품이 되네

소세양과의 연정을 끝으로 황진이는 40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자신의 유언대로 개성 어느 길가에 묻혔다. 세월이 흘러 개성에서 그녀의 무덤을 발견한 평안감사 임백호는 그녀의 부재를 슬퍼하며 시 한수를 읊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워난다
홍안을 어데 두고 백골만 묻혀난다
잔 잡고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신분은 비록 미천한 기녀였지만 학식과 예술성을 두루 갖춘 황진이는 선비들과 대등하게 사귈 수 있었고, 그들과 어울려 금강산을 비롯한 산천을 감상하며, 조선시대 여성으로는 남다른 삶을 살았다. 황진이는 개성 땅에서는 이미 여류명사였다. 1604년 암행어사 신분으로 송도에 갔던 이덕형은 개성 땅을 떠들썩하게 했던 황진이의 미모와 명성을 전해 듣고 이를 [송도기이]라는 책에 남겼다.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황진이는 아리따운 외모를 지닌 선녀였고 천재 소리를 듣는 시인이자 절창이었다.

 

저작권자 © 광교IT기자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