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 화정동에 동백꽃이 피다.

며칠 있으면 2018년 무술년 첫 절기로 입춘이다. 중국 역법에서 비롯되어 문화권이 같은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에서는 봄이 시작되는 날, 입춘은 기쁜 날로 정하여 민속적 행사를 하곤 했다. 이날을 기리고, 닥쳐오는 일년동안 대길(大吉)·다경(多慶)하기를 기원하는 갖가지 의례를 베푸는 풍속이 있었으나, 근래에는 입춘축만 붙이는 가정이 있을 뿐, 그 절일(節日)로서는 기능을 상실했다. 예로부터 “입춘을 첫째, 동풍이 불어 언 땅을 녹이고 둘째, 동면하던 벌레가 움직이기 시작하며, 셋째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닌다.”라고 전했다. 농경사회에서는 “입춘은 농사를 시작하는 날로서 입춘으로부터 88일째 되는 날 밭에 씨를 뿌리고 210일째에는 농작물의 태풍 피해에 대비해야 한다.”라고도 했다.

입춘은 양력 2월 4일경, 태양이 시황경 315°에 도달했을 때를 입춘 입기일로 하여 이후 약 15일간이 입춘기간에 해당한다. 음력으로는 정월의 절기로, 동양에서는 이 날부터 봄이라고는 하지만 추위는 아직도 강하다.

입춘 전날이 '절분'인데, 이것은 철의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이날 밤을 '해넘이'라 부르고, 이때 콩을 방이나 문에 뿌려 귀신을 쫓고 새해를 맞는다고 한다. 입춘을 마치 연초(年初)처럼 본다.

봄의 시작, 새로운 봄이 시작되니 경사스러운 일이 많기를 바라고 나쁜 기운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는 뜻에서 입춘 날에 대문이나 기둥, 들보 등에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는 글을 붙인다. 또 입춘 날에 '한문으로 된 좋은 글귀를 기둥 등에 붙여 복을 비는 풍습'을 ‘입춘첩(立春帖)’, 또는 '입춘축(立春祝)'이라고 한다. 입춘 날 입춘 시에 입춘 축을 붙이면 “굿 한 번 하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여 입춘축이 벽사로 붙여짐을 알 수 있다. 전북에서는 입춘 축 붙이는 것을 춘련(春聯)붙인다. 이를 붙이면 “봉사들이 독경하는 것보다 낫다.”라고 한다. 또 써 붙이지 않고 그냥 글귀를 외워도 좋다고 한다. 전남 구례에서는 입춘 축 붙이는 것을 ‘방악(防惡)한다.’ 또는 ‘잡귀야 달아나라.’ 고 써 붙인다고 한다. 입춘절기를 맞이해서 귀신을 쫓아내고 길운을 가져와 따스한 기운이 감도니 경하하는 일이 많다는 의미이다.

우리 조상은 ‘범이 불알을 동지에 얼리고 입춘에 녹인다.’고 봄의 시작으로 따스한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해학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대한을 지나 입춘 무렵에 큰 추위가 있으면 ‘입춘에 오줌독(장독, 김칫독) 깨진다. 또는 입춘 추위에 김칫독 얼어터진다.’고 구비 전승한다.

글귀는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한다.)', '부모천년수 자손만대영(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 부모는 천년을 장수하시고 자식은 만대까지 번영하라.)', '수여산 부여해(壽如山 富如海: 산처럼 오래살고 바다처럼 재물이 쌓여라.)' 등 평안, 강녕, 부를 기원하는 축하 내용이다.

춘첩 대구(對句)에는 ‘국태민안 가급인족(國泰民安 家給人足: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평안하니 집집마다 넉넉하다.)’, ‘기주오복 화봉삼축(箕疇五福 華封三祝: 화는 땅이름으로 ‘기주’라는 사람이 요 임금을 보고 아들을 많이 낳고, 장수하여 부자 되세요.)’, ‘문신호령 가금불상(門神戶靈 呵噤不祥: 집에 깃든 신령이 상서롭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 ‘우순풍조 시화년풍(雨順風調 時和年豊: 비바람이 순조로워 시절이 평화롭고 풍년이 오라.)’ 등이며, 대련(對聯)을 보면 ‘거천재 내백복(去千災 來百福: 온갖 재앙은 가고 모든 복은 오라.)’, ‘요지일월 순지건곤(堯之日月 舜之乾坤: 요임금 세월이고 순임금 세상이어라.)’, ‘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 땅을 쓸면 황금이 생기고 문을 열면 만복이 온다.)’, ‘계명신세덕 견폐구년재(鷄鳴新歲德 犬吠舊年災: 닭 울음소리에 새해 덕이 들어오고 개 짖는 소리에 묵은해 재앙이 나간다.)’ 등이다. 단첩으로는 ‘상유호조상화명(上有好鳥相和鳴: 하늘에는 길한 새들이 서로 조화롭게 운다.)’, ‘일진고명만제도(一振高名滿帝都: 이름을 높이 떨쳐 장안에 가득하라.)’, ‘일춘화기만문미(一春和氣滿門楣: 봄날의 화기가 문 위에 가득하다.)’, ‘춘광선도길인가(春光先到吉人家: 봄빛은 길한 사람 집에 먼저 온다.)’, ‘춘도문전증부귀(春到門前增富貴: 봄이 문 앞에 오니 부귀가 늘어난다.)’ 등을 붙인다. 입춘 축은 붙이는 곳에 따라 내용이 다르고, 큰방 문 위의 벽, 마루의 양쪽 기둥, 부엌의 두 문짝, 곳간의 두 문짝, 외양간의 문짝에 붙이는 등 각기 다르다.

옛날 대궐에서도 입춘이 되면 내전 기둥과 난관에 문신이 지은 연상시(延祥詩)중에 좋은 것을 뽑아 연잎과 연꽃무늬를 그린 종이에 써서 붙였는데, 이를 춘첩자(春帖子)라고 했다. 

사람은 뜻을 세움은 입지(立志)라 하고 그 뜻을 세상에 펴냄을 입신(立身)이라한다. 나라를 일으켜 번영하게 함은 입국(立國)이요, 봄기운을 일으켜 세움은 입춘(立春)이다. 입(入)이 아니라 입(立)이라는 표현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굳센 의지로 완성해 나아가야하는 일이다. 또 입춘 날 먹는 음식은 오신채(五辛菜)를 먹는 입춘절식(立春節食)이다. 오신채는 시대와 지방에 따라 종류가 다르지만 파, 마늘, 자총이, 달래, 평지, 부추, 무릇, 미나리 새순 가운데 노랗고 희고 붉고 파랗고 검은 다섯 가지색의 매운 맛이 나는 채소로 봄나물을 먹음으로써 인생을 극복하라는 의미이다. 험한 세상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인생오고(人生五苦: 다섯 가지 인생의 괴로움)를 상징하듯 계절을 알리는 오신채 봄나물은 세상을 움직이는 자연의 이치(理致)로 지루한 겨울잠에서 깨어나, 온 몸에 퍼져 몸의 생기를 일깨워주기를 희망해본다. 입춘절식은 한 해를 새롭게 출발하기위한 청량제요, 자극제로써 가치가 충분해 몸과 마음의 화평을 바라는 마음으로 세계의 불안을 해소하고 평창 동계올림픽이 평화스럽게 끝나기를 간절하게 소망해본다.

 

* 건양의 유래 Tip: 조선시대 예송논쟁의 두 주인공이었던 당시 유명한 정치가 미수 허목과 우암 송시열에게 숙종 임금이 입춘 일을 맞아 “좋은 글귀를 청하자 미수 허목은 입춘대길을 지었고, 우암 송시열은 건양다경을 지었다.”라고 했다. 또 “조선은 명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해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김홍집 내각은 일련의 관제개혁을 추진하면서 동년 11월 15일에 칙명으로 개국 505년(고종 33)부터 일세일원(一世一元)의 원칙에 입각하여 연호를 세우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고, 이때부터 태양력 사용과 함께 건양연호를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보다 앞서 갑오경장 때 1392년(태조1)을 개국기원을 채택 하여 왕조의 개국연차를 계상해 1894년(고종31)을 개국 503년으로 표기하였다. 이 같은 일련의 조처는 표면적으로는 청나라와의 종속관계를 청산하는 자주적 성격의 발로로 보이나, 실제로는 친일내각을 통한 일본세력의 확대를 의미하는 점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건양(建陽)은 1896년부터 1897년 8월까지 사용되었던 조선 고종시대 최초의 연호로 사용하면서 고종 황제가 건양에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했다는 설도 있다. 건양이라는 연호는 대한제국의 수립으로 다시 광무(光武)로 고쳤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융희(隆熙)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연호를 사용하다가 미군정기(1945∼1948)에는 서력기원을 사용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 후에는 연호에 관한 법률(법률 제4호)에 의해 단군기원을 공용연호로 제정, 서기 1948년을 단기 4281년으로 사용하였다. 그 뒤 국제조류에 따라 1961년에 연호에 관한 법률(법률 제775호)을 공포, 서력기원을 공용연호로 사용하게 되었다.”라고 연호[年號](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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