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노인복지관 '역사탐방반'에서 수원의 등록문화재, 수원향교, 팔달산 지석묘 탐방

광교노인복지관 역사탐방반(일행 6명)은 지난 3월 28일(수) 강사인 김희태 선생님과 함께 수원시 교동 일원인 등록문화재(부국원, 구 수원시청, 구 수원문화원), 수원향교, 팔달산 지석묘 등 역사탐방을 했다.

교동의 지명에 유래가 된 수원향교의 대성전을 관찰하고 옛 수원 신사의 자리와 팔달산 지석묘를 돌아보는 의미있는 시간이 됐다.

일행은 먼저 교동의 대한성공회 수원교회로 갔다. 입구에는 신명학교와 신명유치원 등의 교육 시설과 성 피득 보육원이 있었다고 안내문에 쓰여 있었다. 지금은 표석이 새겨진 안내문을 통해 관련 사실을 남기고 있으며 옛 성당의 모습은 사라졌다.

수원교회 맞은편 부국원은 과거 수원법원 및 검찰청 건물로도 사용되었으며 현재 모습도 오랜 세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다행히 수원시가 매입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수원시의 근대문화유산을 상징하게 되었다고 선생님이 설명해 줬다.

인쇄거리로 조성된 교동의 거리에는 다수의 근대문화유산이 조성되어 있는데 수원의 등록재인 부국원(등록문화재 제698호), 구 수원문화원(등록문화재 제597호), ’구 수원시청사(등록문화재 제598호) 건물을 볼 수 있었다.

구 수원시청사는 6.25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 모더니즘 건축이 시작되는 시기에 건립된 관공서 건물이다.

구 수원 문화원은 금융회사인 조선중앙무진회사 사옥으로 건립되었다. 1956년 수원시 임시청사, 1958년 수원시청 별관, 1960년부터 2007년까지는 수원시 문화원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수원시 가족여성회관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빨간색 벽돌의 문화원 건물과 회색의 시청사 건물은 오랜 역사가 담겨 있음을 한눈에 느끼게 했다.

수원에는 모두 6점의 등록문화재가 팔달구에 자리하고 있다. 그 이유는 현 팔달구가 과거 수원화성 팔달문을 중심으로 모든 상권 등이 밀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수원향교 홍살문
▲ 수원향교 하마비

수원향교(水原鄕校)는 효(孝)와 충(忠)과 예(禮)와 경(敬)의 정신적 유산의 고향으로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된 곳이다.

향교는 고려 조선시대, 지방 교육기관의 기능을 하면서 성현의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수원향교의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가 세워져 있었다. 하마비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새겨져 있다. ’대소인원개하마‘는 신분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비석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향교는 사전적 의미로는 크게 제향과 강학(교육)이라는 측면에서 활용이 된 건축물이다.

선성(先聖)의 위패(位牌)를 봉안한 대성전(大成殿)이 있고 당하(堂下) 좌우에 선현(先賢)들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던 동·서무가 있어 이를 문묘(文廟)라 불렀다.

문묘 앞에는 유생(儒生)들이 학습하던 명륜당(明倫堂)이 있고 그 좌우에는 유생들이 기숙하던 동·서재가 있는데 주로 동재에는 양반계급을 서재에는 그 이하 계급을 기숙하게 하였다.

수원향교는 공자님을 비롯한 유교의 다섯 분의 성인과 우리나라의 현인 열여덟 분, 중국의 현인 두 분 등 모두 25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향교에 제사공간을 두어 정기적인 제사를 시행하였던 것은 이를 통하여 여기에 모셔진 유현(儒賢)들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고 배우게 하고자 함이었다.

지금도 수원향교에서는 매월 음력 초하루(1일) 보름(15일)에 분향례를 행(行)하고 봄과 가을에는 석전대제를 봉행하며 명륜대학과 청소년 인성 교육과정을 통하여 우현들의 학문도 계승하고 있다.

을묘년(1795)의 원행을 그림으로 볼 수 있는 팔폭병풍의 첫 장은 ‘화성성묘전배도(華成聖廟展排圖)’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정조는 수원 화성에 도착한 뒤 3일차 공식 행사의 첫 시작으로 팔달산 아래에 있는 수원향교 대성전으로 행차해 전배를 하였다.

수원시 팔달산 지석묘군(支石墓群)은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로 현재까지 총 4기가 확인이 되었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 흔히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현재 수원시립도서관의 동쪽 구릉에 위치하고 있는데, 여기서 정상부 쪽으로 약 70m 올라가면 화성 성곽이 위치하고 있다.

1호, 2호 고인돌은 7m 거리를 두고 비교적 낮은 구릉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팔달산 정상의 화성이 있는 쪽을 향하여 50m 정도를 더 올라가면 오솔길의 왼편으로 3호, 4호 고인돌이 위치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인돌의 존재는 청동기 시대에도 수원에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는 지표유물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수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형태도 각각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팔달산에 있는 고인돌에서도 성혈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성혈은 바위의 표면에 동그란 홈을 새긴 것으로 이러한 성혈은 주술적인 의미 혹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석묘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굄돌을 지상에 세워서 돌방을 이루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는 탁자식과 무덤방이 땅속에 있으면서 받침돌에 덮개돌이 놓인 바둑판식, 민 땅위에 덮개돌이 놓인 개석식으로 구분된다. 현재 우리나라 전역에 약 3만기 정도 남아있다.

한편 수원향교는 1291년(고려 충렬왕 17년) 당시 수원의 읍 중심이었던 화성시 봉담읍 와우리 화산 앞에 세워져 있었다.

그 후 1789년(정조13년) 가을 500년 가까운 세월을 화산 앞 구읍지에 세워져 있던 것을 정조대왕이 부왕(父王)인 사도세자의 원침(圓寢)을 양주 배봉산에서 현재의 화산으로 천장(遷葬)하기 위하여 수원읍지를 팔달산 동쪽 현재 4대문 안으로 옮길 때 현재 위치인 교동 43번지에 이전 건축하게 되었다. 처음 이전 당시에는 급히 서둔 탓으로 목재 대부분은 구건물의 것을 재활용하였으며 건물의 하부가 물에 잠기어 목재가 썩는 등 문제가 발생하여 1796년(정조19년) 개축하게 되었고, 그 후에도 훼손되거나 화재로 인하여 수차에 거쳐 보수하여 왔다.

향교는 성균관(成均館)의 하급관학(官學)으로 일명 향학(鄕學)이라 불렀으며 지방에 유일한 공립중등교육기관으로서 수재를 모아 학문을 강습하여 왔다.

수원향교 관람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바로 옆에 있는 사무소에 방문하여 관계자의 안내를 받으면 된다. 토요일 일요일은 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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