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사비백제의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부여여행

「편집자주」: '김희태의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사비백제의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부여여행을 게재한다.

김희태 강사는 지난해 7월부터 광교노인복지관 역사탐방반에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강좌를 맡아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암기가 아닌 이해에 중점에 두고 강의 진행, 문화재를 바라보는 법을 이해하고, 사진과 영상 자료를 통해 학습 진행, 역사탐방 때는 그 동안 배운 학습을 이해하는 장으로 활용, 강의를 통해 우리 주변의 문화유산 혹은 이야기를 소재로 스토리텔링을 찾아보고 있다.

김희태 강사 약력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졸업

성공회 대학교 시민사회복지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수료

-현)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현) 평택자치신문 전문필진

-현) 논객닷컴 칼럼리스트

김희태 강사 저서, 연재

-화성 저널, 이야기가 있는 화성 연재

-뉴스타워,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연재

-평택자치신문, 김희태의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연재

-논객닷컴, 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연재

 

부여는 백제의 세 번째 도읍이자 122년간 백제의 도읍으로, 인근의 공주와 익산과 함께 백제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인식되는 곳이다. 이번 부여여행을 통해 사비시기의 백제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산리 고분군이 들려주는 백제의 역사를 조명할 수 있다. 또한 백제 멸망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국내 최초의 인공연못인 ‘궁남지’, 백제 멸망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낙화암’과 ‘고란사’, ‘조룡대’ 등을 소개하고자 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 백제의 멸망을 기억하다.

▲ 정림사지 오층석탑, 백제 시기의 석탑으로는 익산 미륵사지 서탑과 함께 유일하다

부여에 위치한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일반적인 석탑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백제 시기의 석탑으로는 미륵사지와 함께 유일하게 남아있는 석탑이면서 동시에 석탑의 기단부에는 백제 멸망의 기록인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대당평백제국비명’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의 의자왕과 대신들이 항복을 하면서, 이러한 자신들의 공적을 적은 내용을 새겨놓은 것으로 보통 이런 경우 ‘기공비’라고 해서 비석을 만들어 세워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 부여 석조,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함께 백제 멸망의 기록이 새겨진 문화재다.

본래 백제를 멸망시킨 뒤 이러한 공적을 담은 기공비를 세워두어야 했지만, 당시 백제는 수도인 사비와 웅진 등의 일부만 점령되었을 뿐, 그 이외의 지역은 아직 건재한 형태였다. 따라서 백제부흥군이 활발히 조직이 될 수 있었고, 기공비를 세울 여건과 기반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급하게 비문을 새길만한 곳을 찾다가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비문을 새기고, 같은 내용을 부여 석조에다 새겨 놓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삼전도의 굴욕을 상징하는 서울 삼전도비와 묘하게 닮은 부분인데, 현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국보 제9호로 지정되어 사비 시기의 백제 문화유산을 대표하고 있다.

최초의 인공연못인 궁남지와 백제 무왕

<삼국사기>를 보면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인공연못이 ‘궁남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궁남지는 무왕 때인 634년에 궁궐 남쪽에 못을 파서 물을 20여리에서 끌어와 조성했으며, 638년에 무왕이 큰 못에서 궁녀들과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렇듯 큰 인공연못을 조성한 이유는 크게 당시 부여의 지형이 한몫했는데, 성왕이 사비로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 이곳은 늪지대이자 버려진 땅이었다.

▲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인공연못인 궁남지의 전경

그랬기에 왕권을 높이고자 했던 성왕의 뜻과 부합이 될 수 있었고, 새로운 계획도시인 사비성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궁남지를 조성한 백제의 무왕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서동요’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무왕의 출신성분이 낮았지만 왕이 되어 백제를 다시 부강하게 했다. 이러한 무왕의 흔적을 궁남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궁남지는 단순한 연못이 아닌 또 다른 백제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보물 같은 장소라 할 수 있다.

부소산성에 남겨진 백제의 흔적, 낙화암과 고란사, 조룡대와 백마강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도 ‘낙화암’과 ‘삼천궁녀’의 이야기는 알고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부소산의 정상 부분에 자리한 낙화암은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의 모습과 잘 어우러지는데, 낙화암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지는 백마강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은 연출한다. 이러한 낙화암에서 백제 멸망 당시 삼천궁녀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는데, 문제는 이러한 내용이 후대에 각색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는 의자왕을 모욕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주색에 빠진 암군의 이미지를 퍼뜨려 백제 멸망의 당위성을 주장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삼천궁녀 이야기는 반드시 시정이 필요하다.

▲ 백마강에서 바라본 낙화암의 모습
▲ 고란사에 그려진 삼천궁녀 벽화
▲ 소정방이 어룡을 낚았다는 조룡대, 이때 쓴 미끼로 인해 지금도 백마강으로 불리고 있다.

낙화암을 뒤로하고, 백마강변으로 내려가다 보면 ‘고란사’라는 사찰과 마주할 수 있는데, 창건 연대는 고려 현종 때로 낙화암에서 떨어진 삼천궁녀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사찰이다. 지금은 고란사 경내에 있는 ‘고란약수’와 ‘고란초’로 더 유명하며, 고란사 벽에 그려진 삼천궁녀 그림 역시 볼만하다. 또한 고란사에서 내려와 고란사 나루터에 다다르면 백마강에 돌출된 바위를 볼 수 있는데, 이 바위의 이름은 ‘조룡대’다. 이 바위에 대한 전설은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기록의 요지는 사비하(=백마강)의 바위에서 소정방이 어룡을 낚았다는 전설이다. 당시 소정방은 어룡을 낚기 위해 백마를 미끼로 썼기 때문에 백마강으로 불리게 되고, 이는 고스란히 지명으로 남게 된다.

사비 시기의 왕릉인 능산리 고분군과 의자왕단

능산리 고분군은 크게 7기의 고분이 있는데, 앞줄에 두 번째 줄에 3기씩 나열이 되어 있고, 제일 뒤에 1기가 자리하고 있는 형태다. 이러한 능산리 고분군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고분은 ‘동하총’인데, 동하총은 백제의 묘제 양식에서 좀처럼 보기 드물게 벽화가 확인이 되어 눈길을 끈다. 아울러 묘제 양식의 변화 과정과 유물을 연대를 통해 능산리 1호분은 위덕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 사비 시기의 왕릉인 능산리 고분군
▲ 동하총의 내부에 그려진 벽화, 지금은 모형도를 통해 내부 벽화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난 2010년 이곳에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의 가묘를 조성한 의자왕단을 만날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의자왕은 웅진에서 항복한 뒤 부여융과 대신, 백성들과 함께 당나라의 수도인 낙양의 웅천문에서 당 고종에게 포로로 인계되는 치욕을 맛보게 된다. 이후 의자왕을 꾸짖은 당 고종이 관례대로 의자왕의 죄를 면해주는 조치를 취했지만, 불과 1년 뒤에 의자왕은 세상을 떠났다.

▲ 능산리 고분군에 자리한 의자왕단, 현재 가묘로 조성된 의자왕단을 통해 의자왕의 재평가와 백제 멸망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이때 당나라는 의자왕을 북망산에 위치한 손호와 진숙보의 곁에 묻었는데, 손호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암군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또한 진숙보 역시 진나라를 망하게 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표면적으로 의자왕은 이 둘과 동격으로 취급받게 된다. 지난 2000년 의자왕이 잠든 중국 허난성 뤄양시에 있는 북망산의 흙을 능산리 고분군으로 가져와 의자왕단을 조성했다. 훗날 의자왕의 능이 확인이 된다면 그때는 지금처럼 가묘가 아닌 온전히 혼백을 모셔와 능을 조성하고, 의자왕과 백제 멸망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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