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산성 세마대와 세계유산 조선왕릉인 융건릉 탐방길에 오르다.

지난 8일(수) 광교노인복지관 역사문화탐방반 수강생 11명은 김희태 강사의 인솔 하에 역사의 현장인 독산성과 융.건릉을 탐방했다.

역사문화탐방반 김희태 강사는 매주 수요일 오후 1시에 2층 강의실(가람터)에서 PPT 자료를 이용해 강의를 진행하며 수시로 현장탐방을 진행하고 있다.

▲ 독산성 보적사

이번 현장탐방은 지난 7월 4일과 11일 2회에 걸쳐 오산의 역사와 독산성, 융릉과 건릉의 이해에 대한 수업을 기초로 하여 실제 현장을 찾아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얻는 시간이 됐다. 

수강생들은 9시에 복지관 주차장에서 모여 승용차 3대에 나누어 타고 오산 독산성(禿山城)으로 향했다.

독산성과 세마대지는 1,095m의 테뫼식 산성과 산 정상부에 권율 장군의 승전과 관련된 장대를 말한다. 독산성은 사적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최초 독산성은 백제에 의해 쌓여진 토성으로 인근의 보적사 역시 최초 백제 때 세워진 사찰이다.

▲ 독산성 동문

일행은 해탈의 문이라고 이름 붙여진 독산성의 동문을 통해 보적사(寶積寺)로 들어갔다. 보적사는 독산성 동문 안에 있는 사찰로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어졌고, 용주사를 세울 당시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과 요사 3동이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석가여래와 약사여래, 지장보살을 모신 대웅전과 요사 2동과 3층 석탑이 있다.

▲ 독산성 지적삼각점

독산성에 오르니 오산·수원·신갈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산성 정상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세마정이 세워져 있다.

고려를 거쳐 임진왜란 때까지 이용된 독산성은 일명 독성산성(禿城山城)으로 불리며 도성의 문호와 군사 요충지로 중요한 곳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대치했던 권율 장군이 근왕병 2만을 모아 북상하는 도중 이 성에 진둔하여 수만의 왜병을 무찌르고 성을 지켰던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물이 부족할 것이라 예상한 왜군이 포위를 하고 시간을 끌자, 권율 장군은 잘 보이는 곳에 말을 끌고 가 흰쌀을 말에 끼얹어 말을 씻기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이에 왜군은 성안에 물이 풍부하다고 속아 퇴각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이때부터 독산성의 서장대를 세마대라고 부르게 되었고 권율 장군은 이곳에서의 승리로 서쪽으로 향하던 왜군의 진로를 막았다.

▲ 독산성 세마대

독산성은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5년(1602) 당시의 화성부사 변응성이 개축했다. 정조는 수원성 축성과 함께 독산성과 세마대를 개·중건(1796)하고 세마대를 향로봉이라 불렀다.

성 둘레는 약 3,600m이고, 현재 석축은 약 400m 정도가 남아 있으며, 성문 5개(동문, 남문, 암문, 서문, 복문)과 치 8개, 우물 1개, 수로 1개가 남아 있다.

<기전영지>의 기록을 보면 남문은 독산성의 정문인 진남루(鎭南樓)가 있는데, 이곳에는 독정려왕릉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야기의 요지는 크게 사도세자가 온양을 오갈 때 독산성을 들렀는데, 군장으로 있던 이두섭이라는 인물이 진남루 아래 여왕릉으로 전하는 무덤이 있다고 말한 대목이다. 물론 현재까지 고고학적인 고증이나 기타 자료 등이 없기 때문에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한편 독산성의 남문 일대로는 발굴조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다.

서문은 남문과 함께 독산성의 주 출입구로 정조 14년 독산성에 행차한 정조가 서문을 통해 출입하였다.

▲ 융릉, 정자각

탐방문화반은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에 위치한 세계유산 조선 왕릉인 융건릉으로 이동했다.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의 효성을 엿볼 수 있는 왕릉으로 1970년 5월 26일에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융건릉에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헤경궁 홍씨를 모신 융릉과 정조와 그의 비 효의황후를 모신 건릉이 있다.

이곳은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고자 했던 정조의 효성으로 빚어진 화려하고 아름다운 왕릉으로 새로운 조선을 꿈꿨던 개혁 군주의 왕릉이다.

소론계 학자에게 학문을 배운 사도세자는 노론과 갈등을 일으키다가 1762년에 뒤주에 갇혀 죽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조가 당시 양주에 있던 아버지 묘(영우원)를 이곳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불렀으며 고종 때 황제로 추존하면서 융릉으로 바꾸었다. 정조가 아버지 곁에 묻히기를 원하여 부자를 한 구역에 모시게 되었다.

▲ 융건릉 입구 수령 130년 된 소나무,

융건릉 입구에서 수령 130년 된 멋진 소나무가 있으며 매표소를 들어가면 오른쪽에 재실이 있다. 재실은 능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으로 왕릉을 관리하던 능참봉이 상주하였다. 재실에는 오래된 향나무와 천연기념물(제 504호) 개비자나무가 있다.

재실에서 나와 좀 올라가면 두 갈래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은 융릉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은 건릉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먼저 융릉으로 방향을 잡아 기품 있는 소나무 숲길로 들어갔다. 솔향기를 맡으며 시원한 그늘 길을 걷다보니 원대황교가 나왔다. 한쪽엔 융능교라 새겨져 있었다. 대황교는 정조가 현륭원을 참배하러 갈 때 건넜던 다리로, 지금의 화성시 황계동과 수원시 대황교동 사이(현재는 수원 비행장 내에 위치)에 있었다. 수원 비행장 확장 공사로 1970년대에 대황교동에서 곡반정동 등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주민들의 노력으로 다행히 이 돌다리를 모두 옮겨 융릉(隆陵) 바로 입구 자리에  다시 융릉교[隆陵橋, 원대황교(原大皇橋)]를 놓음으로서 본연의 형태를 일부나마 재현하게 되어 현존할 수 있게 되었다.

좀 더 들어가니 왼편에 곤신지가 나왔다. 원형 연못 곤신지는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 1790년에 조성되었으며 곤신방은 융릉의 생방으로 이곳이 좋은곳이기 때문에 판 연못이다.

▲ 융릉

융릉의 형국은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인 반룡농주형(盤龍弄珠形)으로, 지세가 부드럽지만 힘이 있다. 정조는 이런 지세를 알고 융릉에서 내려다보이는 오른 쪽 용의 머리 부근에 여의주 모양을 한 원형의 연못을 파게 했다. 이런 형태의 연못은 한국의 다른 곳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등 동북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조경이다.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할을 하는 금천교를 지나니 묘역이 열리면서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과 정자각이 보였다. 그 뒤로 능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비각, 무석인, 문석인, 능침, 곡장이 눈에 들어왔다.

▲ 융릉 홍살문 앞에서

융릉은 원(園)에서는 나올 수 없는 무인석이 세워지고, 병풍석과 연꽃 봉우리, 와첨상석 등 화려한 봉분으로 독특한 석물 배치가 되어 있다. 연꽃봉우리 인석은 아직 채 피지 못하고 저버린 사도세자의 꿈과 같아 애절한 느낌이 든다.

정조는 이미 영릉 천봉 때 폐지하기로 한 병풍석을 굳이 만들게 하면서 비명에 세상을 떠난 생부의 능을 왕릉의 제도로 그 격을 높여서 꾸미려고 한 정조의 남다른 심정이 모란 연화문을 장려하게 조각한 병풍석을 쓴 데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문화탐방반은 융릉을 배경으로 홍살문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건릉으로 이동했다.

▲ 건릉

건릉은 원래 정조의 유언에 따라 사흘 만에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현륭원 동쪽 두 번째 산줄기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효의왕후가 죽자 풍수지리 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여기로 이장하면서 합장했다. 정조 자신의 능침은 사도세자처럼 병풍석이나 와첨상석 등이 없이 그저 난간석만 자리하고 있다.

건릉 주위에는 소나무와 갈참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이례적인 폭염이었지만 시원하게 그늘 길로 다녀왔다.

돌아오는 길에 광교IT기자단 김영기 부단장의 차에 탄 일행 4명은 융릉과 이어진 화산 남쪽 기슭에 있는 용주사(龍珠寺)를 들렸다.

▲ 용주사 대웅보전

융릉의 원찰인 용주사는 왕릉에서 1.5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정조의 효심이 구석구석 배어 있는 용주사에는 국보 제120호 범종과 정조가 심었다는 회양목(천연기념물 제10호) 등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용주사에는 특이하게 외삼문이 있는데 단순한 사찰로 보기는 어렵다. 경내에는 호성전과 부모은중경 탑이 세워져 있다. 호성전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셨다. 부모은중경은 불교의 경전이지만 부모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내용은 유교에서의 효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조는 용주사에 부모은중경 목판을 하사했는데 지금도 용주사 박물관에 남아있다.

▲ 용주사, 국보 제120호 범종각

대웅보전 낙성식 전날 밤 정조대왕이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龍珠寺)라 하였다. 그 후 효행의 본찰로써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져 인성교육과 효행교육의 중추적 기능을 다하고 있다,

문화탐방반 김진성(80세) 어르신은 "오늘 처음으로 독산성, 융건릉, 용주사를 둘러보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고 했고 또 한 어르신은 "수원에 살면서 학생시절 소풍 오던 곳인 데 오랜만에 오니 길도 많이 변했다. 복지관에서 이렇게 탐방 올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해 서울·수원시.화성시는 정조효문화제에서 222년 만에 전 구간을 완벽 재현한 ‘정조대왕능행차’로 ‘2018 한국관광혁신대상’ 종합 대상을 공동 수상했다.

화성시는 ‘효의 길, 융릉으로 향하다’라는 주제로 서울·수원시와 1795년 을묘원행 이후 222년 만에 서울 창덕궁부터 수원화성을 거쳐 화성 융릉에 이르는 59.2㎞ 전 구간을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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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취재 : 김봉집 단장, 김영기 부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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