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노인복지관 역사문화탐방반 부여, 논산 백제문화를 찾아서~

광교노인복지관 역사문화탐방반 수강생 7명은 9월 5일(수) 김희태 강사와 함께 부여 성흥산성(가림성)과 대조사, 논산 관촉사 및 계백장군유적지를 다녀왔다.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이며 국내여행안내사인 김희태 강사는 백제의 성곽인 가림성, 대조사와 관촉사의 미륵불 비교, 황산벌 전투와 백제 멸망에 관점을 두고 탐방을 했다.

초가을 차창 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는 유유히 흐르는 빛나는 뭉게구름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 백제 때 가림성으로 불린 성흥산성의 원경과 성벽의 모습

먼저 부여군 임천면 성흥로 97번 길 167(군사리)에 자리한 가림성(加林城)을 갔다.

가림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石城)이다. 축조연대는 백제 동성왕 23년(501년)에 쌓은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진 테뫼식 산성이다.

▲ 수령 400년 된 느티나무(사랑나무)

돌산 길을 오르다 계단을 올라가니 수령 400년 된 느티나무(사랑나무)가 우리를 맞이했다. 넓은 평지에는 성흥산 해맞이 행사장이 있고 ’古城의 여유로움을...‘이란 표석이 있는데 산성의 거목과 멀리 금강의 자태를 배경으로 사진 잘 나오는 곳이다.

백제 때 가림성으로 불린 성흥산성(聖興山城)은 사적 제4호로 해발 250m의 성흥산 정상부에 돌로 쌓은 석성과 그 아래쪽에 흙과 돌로 쌓은 토성이 있다. 석성의 둘레는 1,350m이고 높이는 4m 가량 되는데, 성 내부에는 우물터·건물터 등이 남아 있다.

▲ 고려개국공신 태사 충절공 유금필 장군 사당이다.

향토유적 8호(1992년5월 6일 지정일)인 유태사지묘는 ’황해도 평주사람으로 923년에 마군장군이 되어 골암진에 침입한 북변을 평정하였으며, 그 뒤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운 유금필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유금필장군은 이 곳 패잔병들의 노략질이 심하고 나쁜 병과 흉년까지 겹쳐 민심이 흉흉하게 되었을 때 군량을 나누어 주고 둔전을 운영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임천 백성들은 감사하여 산 사당을 세워 장군의 공덕을 기리고 해마다 제사를 올려왔다.

▲ 이 곳은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941년 장군이 죽자 고려 태조가 ’충절(忠節)‘이라는 새호를 내렸고, 그 뒤 성종이 ’태사유공지묘(太師庾公之묘)‘라는 어필 현판을 내렸다고 한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苩加)가 쌓았다고 전한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가림성에서 대조사는 차로 5분 거리이며 거대한 미륵불인 보물 제217호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다. 이 석불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으며 크기에 비해 세부 묘사가 없고 조각 기법이 세련되지 않은 점과 신체의 비례가 어울리지 않는 점 등이 관촉사 미륵보살상과 비슷하다.

이 절은 관음보살이 새가 되어 날아와 앉은 자리에 세웠다고 해서 ‘대조사’라 부른다. 특히 충남 지방 일원에 이같이 거대한 양식을 가진 석불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 것은 이 지방에 유행한 미륵신앙에서 연유한 듯하다.

▲ 대조사 원통보전과 삼층석탑

대조사 석탑은 문화재자료 제90호로 석불과 같이 고려 초기에 만들어졌다. 원래 지붕돌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부근에서 몸체 돌을 발견하여 복원하였다. 이 지방에 있는 다른 탑과 달리 통일신라 이후 유행한 3층 석탑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형태로 보아도 신라 탑 양식을 띄고 있다.

탑은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보관하던 장소로 예배대상이었으나 후에 금당 불상의 비중이 커지면서 절의 중요한 상징적인 시설물이 되었다.

▲ 논산 관촉동 비로자나석불입상과 은진미륵의 비교하고 있는 김희태 강사님

점심 식사를 한 후 강경을 지나 논산시 관촉동 반야산 중턱에 자리한 천년고찰인 관촉사로 갔다.

관촉사 경내에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이 모셔져 있고 석등, 배례석, 석탑, 사적비, 대광명전, 미륵전, 석문, 석조불단이 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국보 제323호로 높이가 18m에 이르는 국내 최대 석불로서, 보통 ’은진미륵‘이라 불리고 있다. 미륵불은 56억 7천만년이 지난 뒤에 그 때까지도 못다 구제된 중생들을 위해 나타난다는 미래불로 대개 산이나 들 등 바깥에 세워진 경우가 많다.

▲ 대조사 미극불과 비교해보면 좋은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석조미륵보살입상)

관촉사 사적비에 의하면 고려 광종 19년(968) 반야산에서 나물을 뜯던 여인이 어디선가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려 그 곳으로 가보니 커다란 바위가 솟아 있어 집으로 돌아와 이를 가족들에게 이야기했다. 사위가 이 사실을 관가에 보고하게 되었고 나라의 조정회의에서 논의한 결과 하늘에서 불상을 조성하라고 내려 보낸 바위라 결론짓고 해명대사가 석공 등 인부 100여 명을 데리고 37년의 공사 끝에 완공하였다.

자연암반 위에 허리부분을 경계로 하여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이 보살이 지방에서 많이 유행하는 불교예술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은 거석불(巨石佛)은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들 수 있는데, 이 두 불상은 고려시대에 충남지역에서 크게 유행하던 불상의 양식으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 석등은 보물 제232호로 그 형태가 완전하고 조성연대가 뚜렷한 귀중한 유물이다.

석등은 보물 제232호로 미륵보살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형태가 완전하고 조성연대가 뚜렷한 귀중한 유물이다.

정사각형의 하대석(下臺石) 옆면에는 안상(眼像)을 3개씩 새겼다. 기둥 돌은 둥근 형태의 상·중·하 3개의 돌로 이루어져있다. 화사석(火舍石)은 상하 2층으로 되어 있는데, 네 기둥이 빈약한 반면 화창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원과 4각·8각이 혼합되어 구성되었으며, 안정감이 약간 부족하나 전체적으로 크고 장중한 감을 주고 있다.

▲ 관촉사 은진미륵과 석등(보물 제232호), 석탑

배례석은 1976년 1월 8일 충남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었다. 직사각형의 대석(臺石)으로 길이 204cm, 너비 103cm, 높이 40cm이다. 바닥에는 2단의 직각 괴임을 각출(刻出)하고 그 위의 면석에는 전면에 3개, 단면에 2개의 안상(眼像)을 새겼고, 안에는 고사리무늬 같은 버섯구름 모양을 양각했다. 1단의 면석 위에 2단의 괴 임이 있으나 서남향의 면석은 마멸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석탑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높이는 3,43m이다. 사적비는 관촉사 경내 미륵보살입상의 좌측에 관촉사 사적비가 서 있다. 대광명전은 2층 건물로 1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2층은 각각 3칸,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륵전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정면에 있다.

▲ 논산

석문은 문화재자료 제79호로 관촉사 경내에 들어가려면 이 석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이 석문은 다른 사찰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문으로 양쪽 돌기둥에 ’해탈문(解脫門)‘ ’관촉사(灌燭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화강암을 방형으로 깍아 양쪽 지주를 세웠다.

석조불단은 관촉사 경내에 석조미륵보살입상 바로 정면에 있다.

▲ 민가의 마당에 세워져 있는 불상(사진: 김희태 선생님 제공)

관촉사에서 주차장 오른편으로 5분 정도 걸으면 은진미륵 어머니상이라 부르는 ‘논산 관촉동 비로자나 석불입상’이 있다.

‘관촉동 비로자나석불입상(충청남도 유형문화제 제88호)’는 현재 민가의 마당에 자리하고 있다. 본래 위치는 인근의 사찰에 있던 것을 옮겨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잠시 마트 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휴식을 취한 후 계백장군유적지와 백제군사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계백장군유적지를 가려면 논산시에서 약 5km거리의 탑정호를 지난다. 탑정호(저수지)는 면적 152만 2100평으로 제방길이 573m, 높이 17m로 1941년에 착공하여 1944년에 준공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탑정호의 힐링수변데크 산책로는 아름다운 조형물들과 함께 걷고 싶어지는 곳으로 낭만 그 자체였다.

▲ 벡제군사박물관안의 계백장군 조형물이다.

논산의 역사는 금강유역의 넓고 기름진 땅에 자리한 논산평야는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살아가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현재 논산에 남아있는 많은 유물과 유적들을 볼 때 유구한 역사를 지켜온 곳임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수도를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던 논산은 계백장군의 5천 결사대와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이 신라군이 황산벌을 중심으로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이다. 계백장군 유적지는 백제 말기 성충(成忠)·흥수(興首)와 더불어 백제 3충신으로 꼽히는 계백의 유허지로 최후의 결전장이던 황산벌과 가까운 곳에 있다.

▲ ‘충장사’에는 계백장군의 위패(位牌)와 영정(影幀)을 모셔져있다.

554년 성왕(聖王)이 관산성(管山城)에서 전사한 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641년 의자왕(義慈王)의 즉위 이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면서 신라를 자주 공격했다. 그러나 고립된 신라가 당나라와 협력하여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노리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더욱이 의자왕의 실정으로 국내가 혼란해지고, 고구려가 연개소문의 정변 등 국내 문제로 백제와의 동맹에 소극적으로 되자 백제의 위기는 점차 현실화되었다.

결국 660년(의자왕 20) 소정방(蘇定方)과 김유신(金庾信)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과 백강(白江)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의자왕은 계백에게 5천 명의 결사대를 주어 이를 막게 했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하고 출전하여 1당 100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4번을 싸워 이겼으나 백제군은 결국 중과부적으로 대패하여 계백이 전사했다.

2002년에 계백장군의 사당인 ‘충장사’를 건립하고 매년 논산의 대표적인 축제인 ‘논산딸기축제’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기 위하여 개막일에 맞추어 제례를 지내오고 있다. 충장사는 계백장군의 위패(位牌)와 영정(影幀)을 모셔져 있다.

▲ 계백장군유적지에 있는 계백 장군의 묘

1966년 묘를 발견할 당시, 봉분이 반 이상 붕괴되어 내광이 노출되었으며 광벽까지 일부 파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부적면 사람들이 지석(支石)을 안치하고 내광회벽을 완봉한 후 봉분 둘레 47.6m, 지름 15.15m, 높이 6.5m로 복묘하였다.

1976년 5월 19일에는 봉토를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전백제계백장군지묘(傳百濟階伯將軍之墓)'라고 씌여 있다.

이 황산벌전투로 백제는 비운의 종말을 맞이했으며, 계백장군은 통한을 품고 이곳에 묻혀 있다.

▲ 논산

계백 장군은 사후 백제 유민들에 의해 시신이 거둬졌다고 전해져 오는 가운데 조선 숙종 6년(1680) 계백장군유적지 인근 충곡서원에 무장으로는 드물게 주향으로 모셔 제향해오고 있다.

계백의 혼과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곳인 백제군사박물관에는 3개의 전시실과 호국관, 4D영상관, 정보검색실, 실내체험실, 기획전시실 및 야외체험장 등이 있다.

유물과 영상, 그래픽, 디오라마 등을 통해 백제의 군사와 호국이라는 독창적인 주제를 가진 백제군사박물관은 2005년 3월에 개관하였다.

▲ 충촌공원에 있는 계백장군 동상

계백장군 유적지 내 충혼공원에는 계백장군과 오천결사대의 충절과 호국정신을 기리고 숭고한 애국정신 계승과 국가관 확립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계백장군 동상을 건립하였다.

역사탐방을 마치며 돌아오는 차안에서 성낙열 어르신은 “5월에 광교로 이사와 좋은 프로그램을 찾던 중 광교노인복지관에 역사탐방반이 있어 들어오게 되었다. 고교시절엔 친구들이 역사탐방을 다닐 때 몹시 부러워 했었는데 이렇게 선생님과 이웃을 만나게 되어 정말 좋은 인연이라 생각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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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취재: 김영기 부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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