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역사박물관, 부근리 고인돌, 융흥궁, 성공회 강화성당, 고려궁지, 연미정,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 등 현장탐방

지난 7일(수) 오전 9시부서 오후 8시까지 광교노인복지관 역사문화탐방반은 김희태 강사와 함께 강화도 일원의 유적지를 답사했다.

김희태 강사는 그동안 관내 강의실에서 강의해 왔던 강화역사박물관, 부근리 고인돌, 용흥궁, 성공회 강화성당, 고려궁지, 연미정,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 등 현장탐방을 하며 수강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실감나게 해설을 해 많은 도움이 됐다.

▲ 용흥궁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으며 아름답게 가을단풍이 내려앉아 있었다.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으로 면적은 305.75㎢이고 해안선 길이는 106.5㎞이다. 경기만 북쪽의 한강 하구에 있으며, 동쪽의 염하(鹽河)를 사이에 두고 경기도 김포시와 접해 있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등의 ‘여러 강을 끼고 있는 아랫고을’이라고 하여 강하(江下)라고 부르다가 ‘강 아래의 아름다운 고을’이라는 뜻으로 강화(江華)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강화도의 중심인 강화읍은 고려 전기에 강화현에 속하였고,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왕실이 개경에서 천도한 뒤에는 강도(江都)의 소재지로 기능하였다. 1377년(우왕 3)강화현이 강화부로 승격된 이후에는 부치(府治)가 자리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강화군 소속된 이래 1994년까지 경기도 강화군에 속하였다가 1995년에 강화군이 인천광역시에 속함에 따라 인천광역시 강화군 소속이 되었다.

이번 탐방 길인 강화도는 역사의 현장이자 관광 명소이다. 섬 전체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부근리 지석묘를 비롯하여 역사적인 유물들이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먼저 강화 역사박물관에 주차하고 박물관을 둘러봤다.

▲ 강화 역사박물관

2010년 10월23일 개관한 강화 역사박물관은 강화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오천년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문화유산을 보존·연구하여 전시할 목적으로 세워진 공립박물관이다.

기획전시실에서는 해마다 다채로운 주제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으며 강화 역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상실과 교육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고 있어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강화의 문화재 사진전을 둘러보고 강화 동종과 선두포축 언시말비를 살펴봤다. 이층으로 올라가 보문사 석실 나한상 이야기, 하음봉씨 붕가지 이야기, 전등사 나녀상 이야기, 손돌 이야기, 강도의 궁궐, 고려궁지, 고려청자, 강화 선원사지, 강화에 꽃피운 고려문학, 동국이상국집, 남명천화상송증도가, 팔만대장경, 삼별초, 5진 7보 53돈대, 외규장각, 광성보 전투, 강화도 행렬 등을 살펴봤다.

▲ 강화 부근리 지석묘

박물관 바로 앞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의 하나인 강화 부근리 지석묘가 있다. 1964년 7월 11일 사적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 가운데 대형에 속하는 것으로, 지상에서의 높이 2.6m,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7.1m, 너비 5.5m이며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부근리 고인돌은 모두 10기(基)로, 비지정인 128번 고인돌을 제외한 9기가 세계유산에 포함되어 있다. 대촌부락 마을회관 앞에 있으며 미군부대 전입 등으로 현재 4기만 남아 있다.

이 고인돌 바로 옆에 또 하나의 파괴된 고인돌이 있는데, 굄돌은 없어지고 판석의 뚜껑만 수직으로 엎어진 채 남아 있다.

▲ 연개소문 유적비 앞

고인돌 유적지 근처에 연개소문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이란 비문 앞 팻말에는 1932년 박헌용의 ‘강도지(江道誌)’에 따르면, 강화도 고려산 북쪽에 위치한 시루미산에서 연개소문이 태어났으며 치마(馳馬)대와 오정(五井)에서 무예를 갈고 닦았고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뉘는데 영류왕을 시해한 일로 당시 당나라 혹은 신라의 입장에서는 패륜적인 부분이 강조된 반면 단재 신채호처럼 민족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분명한 건 연개소문은 영웅적 기질이 있었고, 그의 생전에 고구려는 당나라의 침입을 물리치며 그들에게 굴욕을 남겨준 대단한 무장임에는 틀림이 없다.

▲ 김상용 선생의 충의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워진 순절비 옆 심도직물 회사 굴뚝 앞에서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용흥궁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인천광역시 지방기념물 제35호인 김상용 선생 순절비를 들렸다.

기념물35호인 이 비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김상용 선생의 충의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순조 때 유수로 부임한 공의 7대손 김매순이 건립한 순절비이다.

김상용(1561∼1637) 선생의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으로 도승지·대사헌·형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였다.

명종 16년에 출생한 김상용 선생은 장렬 김번의 증손이며 병자호란시 청국과의 화의를 극력 반대한 척화파 김상헌의 형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우의정을 거쳐 인조 15년에 순국하였으며 그 위패는 선원면에 위치한 충렬사에 봉안하였다.

당초 순절비는 구 남문지에 있던 것을 1976년 강화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현 위치로 옮겨 세우던 중 숙종때 증손인 김창집이 신비를 세우면서 구비는 땅에 묻었었는데, 1976년 신비를 현재의 자리로 옮기던 중 파묻혔던 구비가 발견되어 두 비를 함께 세운 것이다.

국내 굴지의 직물회사인 심도직물이 자리했던 김상용 순절비 뒤편에는 그 당시 사용된 공장 굴뚝이 우뚝 서있고 주위에는 목화 꽃송이가 수줍은 듯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 용흥궁

돌솥 갈비탕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용흥궁으로 갔다.

예쁜 돌 담벼락을 따라 동네 골목으로 들어가니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고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으며 아름답게 가을단풍이 내려앉아 있었다.

용흥궁은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의 유형 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 강화도령이라 알려진 사도세자의 직계후손 철종이 왕위에 등극하기 전까지 살던 잠저(潛邸)로 터는 그리 넓지 않았다.

잠저구기비각에는 철종잠저구기라 적혀있어 철종이 머물었던 곳임을 증명하고 있다. 용흥궁 게시판에는 전통(茶道)다도예절교육관을 운영하는 (사)한국명선차인회에서 다도강좌 수강생 모집 광고가 부착돼 있었다.

▲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용흥궁을 돌아가니 근처에 대한성공회 강화성당(大韓聖公會 江華聖堂)이 있었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1981년 7월 16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1월 4일 사적 제424호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강화성당이 위치한 강화읍 관청리 언덕은 고려중기 몽고군의 침입에 항쟁하기 위해 강화도에 천도하고 내성을 축조한 남쪽 성터의 일부분으로 강화읍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견자산 언덕마루다.

초대주교가 1900년에 축성한 건물로 성베드로와 바우로 성당으로 명명되었다. 당시 건축 공사는 궁궐 도편수가 주도하였고, 이후 몇 차례 보수가 있었으나 처음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성당 터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위해 배의 형상을 따랐다.

성당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0칸 규모의 2층 건물로, 목골조를 사용하고 벽돌을 쌓아올린 기와집이며, 2층은 바닥이 없는 통층구조이다.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을 응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과 토착정신을 드러나게 하여 외형상으로는 불교 사찰 분위기를 풍긴다.

외부공간의 구성이 구릉지 가람(伽藍)과 유사하게 경사 진입로, 석축계단, 외삼문, 내삼문을 지나 성당에 이르게 되고 성당 뒤 담을 둘린 뒤편에는 사제관이 위치해 있다.

전통과 근대의 복합적인 건축물인 성당 앞 정원에는 1914년 영국에서 기증받은 종이 놓여있다. 성당 내 초입에는 등록문화제인 세례를 받는 ‘수기, 세심, 거약, 직선’이라 새겨진 세레대가 놓여있다.

1910년대까지 강화 지역 선교의 중심이 되었으며 성공회 신학교인 성미가엘신학교가 이곳에 설립된 이후 성공회 한국선교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한국인으로서는 첫 성공회 사제가 된 김희준 신부를 배출하였다.

▲ 고려궁지터에서

용흥궁 공원 주차장에서 다시 모인 일행은 다시 사적 133호 강화고려궁지로 갔다.

고려는 고종 19년(1232년)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최우의 권유로 도읍을 송도에서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로 옮겼다. 이때 옮겨진 도읍터가 고려궁지로 원종 11년(1270년)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8년간 사용되었다.

고려궁지는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어졌고, 궁궐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하여 왕도의 제도를 잊지 않으려 하였다고 한다. 1637년 병자호란 시 강화성이 청나라 군에게 함락되는 등 여러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궁궐과 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고려궁터에는 조선시대의 건물인 승평문, 강화유수부동헌, 이방청, 종각 등이 복원되어 있다.

▲ 명위헌(明威軒)

강화유수부 동헌은 조선시대 강화의 행정 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다. 인조 16년 유수 김신국이 수리하였고, 영조45년 유수 황경원이 헌윤관이라 하였다. 명위헌(明威軒)이라는 헌판은 영조 때 명필인 백하 윤순(白下 尹淳)이 쓴 것이다.

건물 구조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중 겹처마 단층집으로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정비되었다.

▲ 외규장각(外奎章閣)

외규장각(外奎章閣)은 조선 정조 때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으로 특히 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를 보관하던 곳이다.

어람용 의궤의 표지는 특별하게 비단을 사용하고, 종이는 고급 초주지(草住紙)를 사용하였으며, 해서체로 정성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하였다.

병인양요 때에도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은괴 19상자와 함께 프랑스 군의 눈을 자극한 것도 채색배단 표지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식된 어람용 의궤들이었다.

조선 인조(1631)는 옛 고려궁터에 행궁을 건립하고 전각과 강화유수부·규장외각 등을 세웠으나 병자호란 때 함락되고,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완전 소실되는 등 수난의 역사가 되풀이되었다. 프랑스군은 귀중한 책들과 금은괴 등을 모두 약탈해 가고 남은 건물까지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강화행궁을 완전 폐허로 만들어 놓고서야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와 민간단체에서는 프랑스 정부에 계속해서 외규장각 도서의 환수를 요구해 왔다. 2010년 11월 12일 G20정상회의에서 양국의 대통령 간에 외규장각 도서를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임대형식으로 대여하기로 합의하여 145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 강화유수부 이방청은 공사중이라 못 들렸다.

강화유수부 이방청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다로 고려궁터 강화유수부 동헌 앞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다.

강화유수부 안에 있는 6방(이방, 예방, 호방, 병방, 형방, 공방)의 건물 중 이방청으로 조선 효종 5년(1654년)에 유수 정세규가 세웠고, 정조 7년(1783년)에 유수 김노진이 건물 내부를 고쳤다.

1층의 기와집으로 ㄷ자형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 강화 동종

강화 동종은 보물 제11호로 조선시대 강화성문의 여닫는 시각을 알리던 종이다. 종 꼭대기는 용무뉘로 조각되었고 한국종의 특색인 음통이 없다. 종 중앙을 띠로 장식하는 것은 고려시대와는 다른 조선시대 문화의 특징이라 한다. 높이 186.5㎝, 밑지름 141㎝, 두께 15㎝이며, 총 중량 3,912㎏인 종이다.

전체적으로 솜씨가 간결하고 꾸밈이 없어 조선 시대의 문화적 특징을 보이고는 있으나, 주조의 흔적은 다소 거칠고 수준은 평이함에 그치고 있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가려다가 실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차를 타고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누정으로 이동했다.

▲ 월곶진

월곶진은 한강 하구에 위치하여 염하를 통하여 인천 방면을 거쳐 삼남 지방으로 왕래할 수 있으며, 중국과도 교통할 수 있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매우 번성한 포구 중의 하나였다. 원래 교동에 있던 진을 조선 효종 7년에 강화유수 홍중보가 이곳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월곶진 주변에는 월곶돈대와 황형택지, 연미정 등의 유적이 있다. 주변에서는 상당량의 기와편과 자기편 등이 발견되고 있다.

▲ 연미정

연미정은 고려시대 세워졌으며 1995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이곳은 강화 10경 중 하나로 꼽힌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서해와 인천으로 흐르는 물길 모양이 제비꼬리와 비슷해 연미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건물은 팔각지붕의 겹처마로 돌기둥 위에 10개의 기둥을 얹어 지은 민도리집인데 지붕선이 매우 아름답다.

이곳은 강화십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자리로서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연미정에 오르면 북으로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潮流)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북한 땅이 보이는 곳으로 낮이면 파주와 김포시, 북한의 황해도 개풍군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탁 트인 바다 풍경과 더불어 세월이 스며든 성벽, 정자 옆에 선 500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다정하게 마주하고 있다.

마지막 코스로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민통선 북방지역 임야에 위치해 있는 강화 평화전망대로 향했다.

▲ 강화 평화전망대 망배단과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에서

강화평화전망대는 남한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으로 남북한의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고 민족 동일성을 회복하여 평화적 통일의 기반을 다져 나가는 문화관광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지하1층 지상4층 규모로 2008년 9월 5일 개관하였다.

1층에는 통일염원소가 설치돼 있는데 이산가족의 한을 달래고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디지털나무를 설치하였으며 관광객의 소망을 이곳에 적어 뜻을 기리게 했다,

2층은 전망대가 있어 관광객이 북한땅과 주민행활 모습을 직접 조망할 수 있도록 고성능 망원경이 설치돼 있다.

3층은 전망대에서 조망되는 북한 지형을 모형으로 제작하여 정확한 위치를 확인 할 수 있도록 관광객에게 북한의 현황을 설명하는 공간이다.

야외망배단에는 북한에 고향을 둔 이산가족들이 고향을 바라보며 조상들에게 제를 올릴 수 있는 곳으로 상시 개방하고 있다.

▲ 흐린날이라 아쉽지만 제적봉에서 북한 땅을 바라보며~

광교IT기자단 김영기 부단장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 제적봉에서 북한 땅을 지척에서 바라보며 남북 통일을 염원하니 가슴이 뭉클하다.”고 했다.

이날 운전은 김희태 강사와 서울에서 내려온 신영길 사진작가가 수고해 줬다.

입동인 새벽 을씨년스럽게 비는 내리고 날은 어두웠지만 오가는 차안에서는 설렘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꽃을 피워 어릴 적 소풍 가는 기분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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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취재 : 김봉집 단장, 김영기 부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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