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수) 광교노인복지관 역사문화탐방반은 전국에서 가장 격렬한 3·1운동이 일어난 곳이자 일제강점기 가장 잔인한 학살사건이 일어났던 제암·고주리를 탐방했다.

▲ 광교노인복지관 역사문화탐방반,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지(사적 제299호)탐방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은 1919년 4월 15일 화성시 향남읍 제암 고주리에서 아리타 도시오를 비롯한 일본군이 들어와 일제의 무단통치 불법 무력에 맞선 29명의 독립 영웅들을 계획적으로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이들은 제임교회에 15세 이상 남성들을 몰아넣은 뒤 사격을 가하고 불을 질러 23명을 학살하고, 이웃 마을 고주리로 넘어가 독립운동 지도자인 김흥렬 일가 6명을 난도질하여 죽이고 불을 질렀다.

1919년 화성지역 3·1만세운동은 송산지역 사강장터 만세 시위, 3월 30일 향남지역 발안장터 만세 시위, 4월 3일 장안·우정지역 만세시위 등 3개 지역별 만세시위로 전개되었다.

‘화성3·1운동’은 일제 무단통치의 불법적인 무력에 맞선 독립 영웅들의 굳건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일본인 순사 2명이 처단될 만큼 우리의 독립정신은 그 어느 곳보다 적극적이며 뜨거웠다.

역사탐방반 수강생 9명은 13일(수) 김희태 강사와 함께 오전 10시 복지관에 집결한 다음, 2대의 승용차로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으로 출발했다.

▲ 3·1독립가 이정근의사창의탑

먼저 화성시 장짐리 241-6번지에 있는 3·1독립가 이정근의사창의탑을 둘러봤다.

당시 탄운 이정근 의사는 ‘왜왕(倭王) 3년’ 이라는 구호를 친히 만들어 유포했는데 이는 야만적인 침략자 일제가 천벌을 받아 3년이 못가서 채 망할 것이란 뜻이었다. 이후 1919년 3월 31일 화성군 향남면 발안 장날을 이용해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그 한가운데서 탄운 이정근 의사가 발안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부상자가 발생하고, 탄운 이정근 의사는 복부를 난자당해 그 자리에서 56살의 나이로 순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오는 3월 31일 탄운 이정근 의사 순국 99주기 추모제’가 열리는 창의탑은, 이정근 의사의 강인한 독립정신과 온후한 인품을 기리고자 뜻있는 제자들의 열망으로 1971년 3월 31일 의사가 순국한지 52년 되는 해에 세운 기념탑이다.

그리고 발안시장과 3·1운동 벽화거리,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지(사적 제299호)를 탐방했다.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은 제암·고주리 사건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2001년 3월 1일 개관하였다.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은 3·1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학살과 그 실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자 선열들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불굴의 정신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 23인 순국합동묘지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에는 3·1운동순국기념탑(1959년), 23인 순국묘지, 23인 상징 조각물, 3·1정신교육관, 3·1운동순국기념탑(1983년), 스코필드 박사 동상 등이 있다.

제암리는 거룩한 민족저항운동과 수난의 현장으로 제암리 뒷동산 묘소에는 1919년 4월 15일 오후 불타는 예배당 안에서 한 덩어리로 뒤엉켜 최후의 순간을 맞았던 희생자들의 유해가 합장되어 있었다.

제1전시관은 3·1운동의 전개과정, 독립운동가,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과 사건 이후 후손들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판결문, 발굴 출토유물, 진정서 등 실물 자료를 통해 대한독립을 위해 항거한 선열들의 3·1정신과 사건 당시의 상황, 후손들의 활동을 엿볼 수 있었다.

제2전시관은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학살사건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특히, 나치에 의한 프랑스 오라두르 쉬르 글란 학살과 일제에 의한 중국 남경대학살, 제암·고주리학살 사건을 담고 있었다.

▲ 스코필드(F.W.Scofield) 선교사 동상

시청각실에 들어가 제암리 사건의 증언을 토대로 제작된 동영상을 약 17분 정도 관람한 후 영국 출신 캐나다인 스코필드(F.W.Scofield) 선교사 동상을 둘러봤다.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는 내한한 후 3·1운동 때 일제의 포악상을 세상에 알렸고, 1969년 이후에 한국에 영주하여 살며 육영사업으로 여생을 마쳤다.

▲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된 원래의 초가 교회

이어 수촌리 교회로 이동해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된 원래의 초가 교회를 탐방하고 수촌리 교회에서 3·1운동에 관한 영상을 관람했다.

수촌교회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우정면·장안면 주민들과 독립만세운동을 했다. 일본군이 이 지역 일대를 포위하여 불을 질러 마을과 교회가 전소되었다.

이후 1922년 4월 아펜젤러 등의 도움으로 초가 8칸을 건립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고, 1932년 1월 수촌리의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 현재 교회로 사용하는 건물은 1965년 미국인의 후원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 만세 시장

'화성3·1독립만세운동'은

첫째, 1910년 시작된 일제의 식민 무단통치를 종식시킴으로써 식민지 지배정책의 완화를 유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일제 식민지배하 한국민족의 고통과 잔혹한 식민통치의 실상을 폭로하는 한편, 한민족의 독립의지의 열망과 자주독립 정신을 전 세계에 전파하였다.

둘째, 3·1독립만세운동의 거족적 의의는 지역사회에 반영이 되어 화성지역은 3·1운동 직후 구국민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화성3.1운동 만세길'은 1919년 4월 3일 화성 우정, 장안지역 30여 명의 만세꾼을 시작으로 민중 2,000여 명 이상이 참가해 격렬하게 진행된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제암의 주민들은 종파와 계급을 초월하여 모두 함께 나라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났고 함께 희생되었다. 그날의 희생자들이 보여준 민족의식과 단합정신을 이어받아 민족의 대 화합과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사명이라 본다.

한편 수원시와 화성시가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교류를 계기로 손을 맞잡는다. 염태영 수원시장과 서철모 화성시장, 수원·화성시 관계자들은 지난 2월 7일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에서 만나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교류·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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