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화문을 배경으로 단체사진 촬영

광교노인복지관 역사탐방반 11명은 김남환 강사와 함께 지난 7월 31일(수) 오후 1시부터 오락가락 하는 빗속에 경복궁을 답사하고 왔다.

▲ 경복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궁(正宮). 사적 제117호. 광화문 이전 후의 경복궁 모습.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

경복궁은 1395년에 창건된 조선왕조의 법궁(法宮, 왕이 거처하는 궁궐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이다. 위로는 백악산에 기대어 터를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정치와 경제의 중심인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대로]가 있었다.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경복(景福)‘이란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270여 년간 복구되지 못하다가 고종 4년(1867)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그 규모는 7,225칸 반이며 후원에 지어진 전각은 융문당(隆文堂)을 포함하여 256칸이고 궁성 담장의 길이는 1,765칸이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8년에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때 조선왕조는 외국 열강들의 세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895년에는 궁 안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은 이어(移御)한 지 27년째인 1896년에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겨,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당(堂)·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放賣)하고, 1917년 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동행각·서행각·연길당(延吉堂)·경성전·연생전·인지당(麟趾堂)·흠경각·함원전(含元殿)·만경전(萬慶殿)·흥복전(興福殿) 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대조전·희정당 등을 지었다.

궁전 안에는 겨우 근정전·사정전·수정전(修政殿)·천추전(千秋殿)·집옥재·경회루 등과 근정문·흥례문·신무문(神武門)·동십자각 등이 남게 되었으며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하였다.

또한, 궁의 중심건물인 근정전 정면 앞에 매우 큰 석조건물인 총독부청사를 지어 근정전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이 밖에 자선당 자리에도 석조건물이 들어서고 건청궁(乾淸宮) 자리에는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인멸시켰다.

1945년 광복 후 궁은 공원으로 개방되는 한편, 일인(日人)들이 지었던 총독부청사는 정부종합청사로 활용되다가, 1971년에 궁의 동북 담장 가까이에 지어진 목조기와건물 모양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에 들어있던 국립박물관이,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명칭을 고치면서 이 건물로 이건되었다.

구 총독부청사는 1995년 8·15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철거되었으며, 이 자리에 원래 있던 흥례문 권역이 2001년 10월 복원·낙성되었다.

한편, 일제에 의해 건물이 훼철되는 피해를 입은 경복궁을 복원하는 공사가 1991년부터 침전·동궁·흥례문·태원전·광화문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20년에 걸쳐 5단계로 진행되었다. 이로써 고종 당시 지어진 건물의 40%가 복원되고,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조로 지어졌던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경복궁의 주요건물 위치를 보면 궁 앞면에 광화문이 있고 동·서쪽에 건춘(建春)·영추(迎秋)의 두 문이 있으며 북쪽에 신무문이 있다. 궁성 네 귀퉁이에는 각루가 있다.

광화문 안에는 흥례문이 있고 그 안에 개천(開川) 어구(御溝)가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어구에 돌다리인 금천교(禁川橋), 곧 영제교(永濟橋)가 놓여 있고 다리를 건너면 근정문이 있으며 문을 들어서면 정전인 근정전이 이중으로 높이 쌓은 월대 위에 우뚝 솟아 있다.

근정전 뒤의 사정문을 들어서면 왕이 정사를 보는 곳인 사정전이 있고 그 동·서쪽에 만춘전(萬春殿)·천추전이 모두 남향으로 놓여 있다. 사정전 뒤 향오문(嚮五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연침(燕寢)인 강녕전이 있고 그 앞 동서 양쪽에 연생전·경성전이 있다.

강녕전 뒤에는 양의문(兩儀門)이 있고 문 안에 왕비가 거처하는 교태전이 있으며 잇대어서 동쪽에 원길헌(元吉軒)·서쪽에 함광각(含光閣)·동북쪽에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그 뒤로는 후원이 전개되어 소나무가 우거지고 연못·정자 등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다. 흥례문으로부터 이곳까지에는 동서로 낭무(廊廡)가 각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이밖에 궁 서쪽에 수정전이 있고 그 위에 경회루가 있는데 수정전은 의정부 청사로 쓰였던 곳이며, 경회루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또한 건춘문과 영추문 안에도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

경회루(국보 제224호)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장대한 누각 건물로 하층은 네모진 돌기둥을 세우고 상층에는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나무기둥을 세웠다. 주변에는 네모난 큰 연못을 파고 우측면에 세 개의 돌다리를 놓았다. 누각 건물로는 현재 국내에서 제일 큰 규모에 속한다.

향원정은 육각형 평면을 한 정자로 연못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목조구름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보물 제809호)은 침전건물의 하나인데, 이 건물에는 후원의 담장과 굴뚝에 묘사된 십장생(十長生)무늬가 특히 주목된다(경복궁자경전십장생굴뚝, 보물 제810호).

사정전 북쪽에 있는 아미산은 여러 단의 화계(花階)와 그 사이의 나무·괴석 등이 눈길을 끌며 전체적으로 사철의 변화에 따른 조화를 보여 주는 한국식 정원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도 봉황·귀면·당초문 등을 새긴 육각 화문(花文) 장식의 굴뚝(경복궁아미산의굴뚝, 보물 제811호)이 있다. 이밖에 18세기에 만든 바람의 방향과 강도를 측정하는 기기인 풍기대(風旗臺)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보물 제847호).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 있을 때는 경천사십층석탑을 비롯한 국보·보물로 지정된 석조물들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용산에 새로 지어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대부분 옮겨져서 현재는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등 일부만 남아 있다.

 

현재 궁내에 남아 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전 등이며, 복원된 건물은 강녕전·자선당·태원전·광화문 등이다.

▲ 광화문 앞에서 김남환 강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우리 일행은 오후 1시에 국립고궁박물관 앞에 모여 협생문을 통해 광화문 안으로 들어온 후 다시 광화문 밖으로 나와 동편 궁궐 담벼락을 따라 걸어가 경복궁 동남쪽 모서리에 위치한 궁궐의 망루인 동십자각에 대해 김남환 강사의 설명을 들었다.

▲ 동십자각

● 동십자각은 경복궁 동남쪽 모서리에 위치하며 궁궐의 망루였다. 이 목조누각은 1867년(고종 4) 경복궁 복원 당시에 세웠으며, 동십자각에는 원래 망루를 오르는 계단이 있었고 경복궁 담장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를 건립하면서 철거되었다. 망루의 기둥은 하방(下枋)과 창방(昌枋)을 매우 간단하게 돌렸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벽채가 없이 트였다. 공포는 2익공으로, 기둥 사이에는 장화반(長華盤)만을 두었으나, 45도 각도로 짜여진 귀에만은 추녀 뒷부분을 받게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경복궁 앞으로 길이 나면서 경복궁이 훼철되었고 길 한가운데 동십자각만 달랑 남게 되었다. 현재는 사직로와 삼청로가 만나는 길 가운데 위치한다.

이어 경복궁 동문으로 진입하여 흥례문과 함께 복원된 주변 행각과 유화문, 기별청, 영제교, 어도, 금천 등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 흥례문

다음 다소 먼거리에서 건춘문을 보면서 설명을 들은 후, 동궁(비변각, 자선당)에 들려 강사의 설명과 함께 동궁을 답사했다.

▲ 건춘문

● 건춘문은 조선 태조가 한양천도와 함께 처음으로 세웠던 궁궐인 경복궁에 딸린 문으로, 문 안에 왕세자가 거처하던 춘궁(春宮)이 있었으며, 왕족·척신(戚臣)·상궁들만이 드나들었다. 또한 대궐에 열병(閱兵)을 위한 비상의 첩종(疊鐘)이 울리면, 왕을 직접 모시고 있던 시신(侍臣)들이 모여 명령을 기다리던 곳이기도 하였다. 이 문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과 함께 타버렸으며, 현재의 건춘문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정하면서 경복궁과 함께 1865년(고종 2) 12월에 상량(上樑)한 것이다.

● 동궁은 차기 왕위 계승자인 세자의 활동 공간이다. 세자는 떠오르는 해처럼 다음 왕위를 이을 사람이기에 궁의 동쪽에 배치하고 동궁이라 불렀다. 조선초에는 동궁이 궁궐 밖에 있었고, 궐 안에 동궁전을 짓기 시작한 것은 세종 9년(1427)의 일이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고종 4년(1867) 중건되었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개최를 구실로 일본에 의해 완전히 철거되었다. 오늘날의 동궁 일원은 1999년에 복원한 것이다.

▲ 비현각

● 비현각은 세종(世宗) 때 건립되었으며 당시 왕세자였던 문종(文宗)의 업무 공간으로 건립한 것이다. 세자의 거처인 동궁의 자선당(資善堂) 우측(동편)에 위치한다. 세자가 업무를 보던 곳이며 비현(丕顯)이란 크게 밝힌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면6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이며 정면 3칸은 개방하였고 온돌을 깔았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7년 창덕궁에 화재가 나자 창덕궁 재건에 사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9년 경복궁 재건사업이 진행되면서 복원되었다.

▲ 자선당

● 자선당은 세종(世宗) 9년인 1427년 세자인 문종(文宗)의 거처로 건립되었으며 세자와 세자빈이 함께 거처하는 동궁(東宮)이었다. 자선당(資善堂)이라는 이름은 자비로운 성품을 기르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회랑을 지나 우측에 위치하며 세자가 업무를 보는 비현각(丕顯閣)과 나란히 위치한다. 인종(仁宗)도 세자 때 이곳에서 거처했다.

오늘 일정의 마지막 답사인 근정문과 근정전을 둘러보았다.

▲ 근정문

● 근정문(보물 제812호)은 정면 3칸의 중층지붕건물이다. 근정문 좌우로는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 근정전 내부

● 근정전(勤政殿, 국보 제223호)은 1395년(태조 4)에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지어진 건물이며 역대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 등이 거행되었고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1395년에 지은 것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현재의 것은 조선 말기인 1867년(고종 4) 11월에 흥선대원군이 270여 년만에 중건(重建)한 것이다. 다포양식(多包樣式)의 건물로,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이중의 월대를 설치하고 그위에 전각을 세웠다. 정면과 후면, 좌우 측면에 계단이 설치되었으며 상, 하 월대에는 하엽동자를 받친 돌난간을 둘렀다. 각 계단과 월대 모서리에는 12지신상을 조각하였고 정면 계단에는 석수를 조각하였고 답도에는 봉황을 새겨넣었다. 다포양식의 전각은 정면 5칸(30m), 측면 5칸(21m)의 중층 팔작지붕의 큰 직사각형 건물이다. 기단의 4면은 석란(石欄)으로 둘려지고, 월대가 있는 마당에는 박석을 깔았고, 월대 정면 계단 아래에서 근정문 방향으로 좌우에는 정1품에서 종9품까지 품계석(品階石)을 세웠다.

건물 내부에는 12개의 높은 기둥을 정면으로 4개, 측면으로 4개씩을 세워 천장을 받들게 함과 동시에 궁전 안을 중앙부의 내진(內陣)과 주위를 도는 외진(外陣)으로 구분하는 역할을 겸하게 했다. 중앙간 북쪽 후면에 방형(方形)의 보좌(寶座)를 두고, 그 단상에 어좌(御座)와 그 뒤에 일월오악(日月五嶽, 일월곤륜도)을 그린 병장(屛障)을 세우고, 그 위에 화려한 보개(寶蓋)를 달았다. 두공(枓栱)은 상·하층이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이며 내출목에서는 수설(垂舌)이나 앙설(仰舌)이 구름무늬처럼 새겨진 운궁(雲宮)으로 되었고, 살미[山彌] 표면의 초화각무늬[草花刻文]나 단청(丹靑)·금색쌍룡(金色雙龍)과 조화되어 화려한 장식적 효과를 낸다. 전체적으로 장식적 의장(意匠)을 마음껏 담고 있어, 다소 과식(過飾)의 감이 있기는 하나 조선 말기 건축의 정수라 할 수 있고, 당시 건축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표본적 건물이다.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경복궁은 비록 궁내의 건물들 대부분이 없어져서 근정전과 경회루를 제외한 많은 전각들이 복원되었지만, 창건 때의 위치를 지키고 있어 조선왕조 정궁의 면모를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오늘 답사하지 못한 수정전, 경회루,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아미산굴뚝, 소주방, 자경전, 향원정·건청궁, 집옥재, 태원전 등은 후일 날짜를 정해 답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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