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월) 오전 10시에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홍릉에서 우리의 아픈 역사, 지난날의 회한을 달래고 새로움을 배우려고 홍릉 비각 앞에 서 있었다. 1898년 11월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 고영근 ·최정덕 등은 이를 재건하기 위해 독립협회 활동을 저지한 정부 요인을 암살할 계획으로, 폭탄을 제조하고 행동대원을 모집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도망치고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우범선(禹範善)을 죽이기도 했다는 고영근의 용기와 충성을 생각했다.

▲ 홍, 유릉 정문(세계문화유산 등재, 2009년 6월 30일), (남양주 사적 제270호로 등재, 1970년 5월 26일).

홍릉은 고종황제(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와 명성황후(明成皇后) 민 씨(1851 ~1895)를 모신 능이다. 유릉은 순종황제(純宗 1874~1926, 재위 1907~1910)와 순명황후 민 씨, 순정 황후 윤 씨를 모신 능이다. 원래 홍릉은 명성황후 민 씨의 능으로서 서울 청량리에 있었으나 고종이 승하 후 이곳에 옮겨 합장했다. 유릉은 원래 순명황후 민 씨의 능으로 용마산에 있었으나 순종 승하 후 이곳으로 옮겼고, 1966년 순정 황후 윤 씨도 함께 모셨다. 홍‧유릉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고, 조선 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홍릉 재실과 상설도 해설.

전대미문의 치욕적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일본의 후안무치(厚顔無恥), 왕권의 미약함, 정부의 무기력, 열강들의 침탈…. 우리는 황후의 죽음을 발표조차 하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의 압박 때문에 황후를 폐위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1896년 2월 고종은 경복궁을 떠나 아관파천(俄館播遷)했다. 고종은 1897년 2월 덕수궁(경운궁)에 자리를 잡고 그해 10월 자주독립국과 근대국가로서의 희망을 담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 홍릉 홍살문, 석물, 향로가 있는 침전 앞.

조선은 끝내 국권을 상실하고 말았지만, 고종은 1897년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자신을 황제라 칭했다. 고종과 순종은 왕이 아니라 황제이다. 그러니 무덤도 황제의 무덤이어야 했다. 고종은 1900년 남양주 금곡으로 능을 옮기고자 했을 때부터 대한제국 황제국으로서 자존감의 표현으로 중국의 황제릉을 참고하기 시작했다.

▲ 홍릉 능침.

능은 꽃무늬를 새긴 12면의 병풍석으로 봉분을 둘렀으며, 봉분 밖으로 역시 꽃무늬를 새긴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했다. 혼유석·망주석·사각 장명등의 석물을 배치하고, 봉분 밖으로 3면의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제향 공간에 있던 정자각 대신 침전이 있고, 침전 외의 부속건축물로 비각·홍살문·수복방·재실 등 이 있다. 침전 앞부터 홍살문까지 향로를 따라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모양의 석물을 배치했으나, 대부분의 조선 왕릉에 설치한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는 없다.

▲ 고종황제 석비(대한 고종태황제 홍릉 명성태황후부좌).

홍릉의 침전 옆 비각에는 석비(石碑)가 서 있다. 앞면에는‘大韓/高宗太皇帝洪陵/明成太皇后祔左(대한/고종태황제홍릉/명성태황후부좌)’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는 원래 청량리에 명성황후의 홍릉을 조성할 때 제작되었다. 훗날 고종이 승하할 때를 대비해‘大韓/○○○○○洪陵/明成○皇后○○’의 여덟 글자만 새기고 나머지 자리를 비워놓았다. 나머지는 고종이 승하하면 채워 넣겠다는 생각이었다.

홍릉에 서 있는 석비는 일제의 박해로 고종 승하 후 비각 안에 방치되다 1922년 능참봉 고영근에 의해 비로소 비문이 완성됐다고 김세구 사진 전문위원은 전했다.

▲ 고영근 씨 사진과 기사가 실린 사진(아주경제신문에서 복사).

그런데 일제는 1919년 고종 승하 후 ‘대한’이란 두 글자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대한’이라는 국호를 부정해 일제는 두 글자를 삭제하려 했다. 이로 인해 석비는 비각 안에서 4년 동안 나뒹굴었다. 방치되던 석비를 온전하게 세운 사람은 홍릉 참봉이었던 고영근(高永根)이다. 그는 1922년 인부를 동원해 비석의 앞면에 글자를 채워 넣어 비문을 완성한 뒤 일본인들 몰래 석비를 세웠다. 그리고 며칠 뒤 창덕궁 돈화문 앞으로 나아가 순종에게 ‘허락 없이 비를 세운 죄’를 고하면서 석고대죄(席藁待罪)했다.

▲ 홍릉에는 원지원도 형식의 연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 사실은 세상에 알려졌고 일본은 이 석비를 다시 눕혀놓고 싶어도 한국인의 반발이 두려워 그냥 묵인했다. 대신 뒷면에 일본 연호를 새겨 넣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고영근은 참봉에서 쫓겨났다. 현재 석비의 뒤를 보면 한 구석에 몇 글자를 새겼다가 지워버린 흔적이 남아 있다. 누군가 일본 연호를 지워버린 것이다. (들어가서 확인은 못했다)

 

고영근은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자원해서 홍릉의 능참봉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우범선(禹範善)을 죽이기도 했다. 그 사건으로 일본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부탁으로 5년만 복역한 뒤 1909년 조선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명성황후의 충직한 신하로 살다 생을 마쳤다.

▲ 덕혜옹주사진(아주경제신문에서 복사).

이곳에는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 순종과 순명황후‧순정 황후가 합장한 유릉 이 있다. 경내에는 대한제국 의민황태자(영친왕)와 의민황태자 비(영친왕비)의 영원(英園), 의민황태자와 의민황태자 비의 둘째 아들 황세손 이구의 회인원(懷仁園) 2원(園)이 있다. 의친왕(고종과 귀인 장 씨의 아들)과 비가 함께 합장한 묘, 고종황제를 딸 바보로 만든 덕혜옹주 묘와 후궁 묘(고종의 후궁, 의친왕의 후실) 7기가 타국서 수모‧병마에 시달리던 몰락한 제국 황손들이 황실 능역에 함께 묻혀있다.

▲ 홍릉 안내와 상설도 해설, (우)에는 영원, 회인원, 덕혜옹주와 의친 왕 묘 가는 길 안내.)

국운이 쇠락했어도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려 노력한 역사의 흔적이 보인다. 역사의 흔적은 기억이다. 기억은 우리 시대의 문화이고 문화자산이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미래가 없다.

 

※참고 자료

* 능(陵): 왕과 왕후, 황제와 황후의 무덤, 원(園): 왕의 사친(왕의 후궁이나 종친)과 왕세자‧왕세자빈, 황태자‧황태자비의 무덤, 묘(墓):폐위된 왕이나 그 외 왕족과 일반인의 무덤. (문화재청 공능유적본부 – 조선 왕릉과 왕실 계보)

* 아주경제신문: 왕들의 길, 다산의 꿈 남양주를 거닐다. 황호택, 이광표 교수 공동집필(남양주는 물의 도시이다. - 아주 경제, 남양주의 역사와 자연 시리즈 – 남양주에 대한 궁금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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