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더쿵 소리, 춤 절로 나네”

지난달 28일, 서울 청계천 광통교에서는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인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 40호 수표교다리밟기보존회(회장 박종국)의 정기 발표공연이 추석연휴를 맞아 나들이 나온 시민들과 국내외 관광객 500여명이 구경하는 가운데 성황리에 펼쳐졌다.

이번 공연은 정월 대보름날 서울사람들이 즐겨왔던 ‘수표교다리밟기 놀이’의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한 11회째 정기공연으로 서울특별시무형문화재 제 40호 수표교다리밟기 보존회(회장 박종국)가 주최하고 서울특별시가 후원했다.

박종국 회장은 인사말에서 “우리의 민속놀이인 수표교다리밟기는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고 태평시대에는 매우 성행한 놀이였다. 조선시대에는 종각에서 종소리를 듣고 난 후 양반님네 들이 정월 열나흘 날 밤에 다리를 나이 수만큼 밟고, 한해의 무병장수를 빌며, 한쪽에선 북치고 장고 치며, 모두가 어우러져 흥겹게 놀이를 하던 양반다리밟기 놀이다. 외래문화의 급속한 유입으로 우리의 전통문화가 사라져가고 있어 아쉽지만 추석명절 연휴 마지막 날 이렇게 민속놀이 공연의 취지를 살려 서울시민들과 함께 다리밟기 놀이를 즐기게 돼 기쁘다. 추운 정월보름보다는 추석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또 광통교는 유동인구가 많아 오늘 이곳에서 공연을 하게 됐다.”며 “아무쪼록 시민 여러분들이 출연진과 함께 민속놀이를 즐기며 한가위의 편안하고 풍성함이 넘쳐나는 소중한 시간이 되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4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광통교 일원에서 진행된 ‘수표교다리밟기’ 놀이마당은 수표교다리밟기보존회 회원 등 공연단 90여명과 관람객 500여명이 참여해 조선시대 수표교 양반다리밟기의 흥겨운 세시풍속놀이를 재연했다.

이번 공연은 수표교다리밟기 예능(소리부문, 무용부문)보유자와 각 부문(집사, 제금, 소무, 왜장녀, 선소리, 장고, 북)전수생과 중요무형문화재 19호인 선소리 산타령이수자(제금) 등 분야별 전문가들이 다수 참여하면서 전통놀이의 예술성이 더욱 돋보였다.

▲ 예능(소리부문) 보유자 보존회장 박종국(사진 앞줄 중앙)

수표교다리밟기 놀이마당은 총 8개 과장으로 구성 됐으며 첫 번째로 연희 놀이패와 구경꾼이 함께 다리를 밟는 다리밟기를 시작으로 무동춤, 상좌춤, 산타령, 소무춤, 왜장녀춤과 곤나쟁이춤, 방아타령·자진방아타령, 뒷놀음과 길놀이가 차례로 이어지며 공연팀이 관람객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신명나는 한마당 놀이가 펼쳐졌다.

이번 수표교다리밟기 놀이마당에서는 악사(제금)가 쟁쟁~~~~ 하면 다른 악사들이 장고, 북, 징을 일제히 따라 울리고 호적, 향피리의 크고 힘찬 가락이 놀이판의 흥을 돋우며 다리밟기의 시작을 예고했다.

가장 큰 깃발에 수표교다리밟기 보존회를 알리는 본기本旗가 앞장서고 뒤이어 영기令旗가 좌우 양쪽으로 뒤따랐다. 집사, 가무별감, 색동옷을 입은 꽃무동 들이 민무동의 어깨위에 서서 귀여운 손짓과 표정으로 재롱을 떨며 차례로 들어섰다. 승무복을 입고 합장한 상좌上佐에 이어 화려한 복장의 소무춤패가 춤을 추며 뒤따랐다. 하얀 얼굴에 연지곤지 찍고 배꼽을 드러낸 왜장녀(유랑 연예인)들이 엉덩이를 흔들며 우스꽝스러운 춤동작을 하며 모습을 드러내자 구경꾼들의 얼굴은 웃음꽃이 만발하고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이들의 색다른 모습을 보느라 분주했다.

막대기를 든 곤나쟁이(놀이판 정리정돈 역)가 왜장녀 주위로 몰려드는 구경꾼들을 뒤로 물리며 들어서고 전통 복장의 남녀 양반들이 뒤따랐다. 선소리(立唱)산타령 패를 대동한 모가비(놀이판의 우두머리)가 장고를 메고 산타령을 부르며 선창하면 놀이마당 전체는 춤과 놀이가 어우러지는 한바탕 축제의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구경꾼들은 어느새 어깨를 절로 들썩이며 흥이 오른 구경꾼들도 본격적으로 다리밟기 놀이패에 합류하여 한해의 건강과 복을 기원하며 다리 위를 빙글 빙글 두 바퀴 돌았다.

▲ 무동춤

다리밟기과장이 끝나고 제금이 놀이판을 무동춤패로 넘기자 놀이패들이 디귿자 모양의 놀이판 대형으로 서서 놀이판을 짰다. 무동들은 놀이판 중앙에서 타령장단에 맞추어 양쪽에서 마주보며 20보씩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춤을 췄다. 꽃무동은 민무동 위에서 두 손을 어깨높이까지 들어 올려 좌우 양쪽으로 손을 돌리고 손바닥을 아래위로 뒤집으며 재롱을 떠는 춤을 한바탕 추고 난 다음 상좌춤으로 놀이판이 넘어갔다.

흰 고깔에 흰 승무복을 입은 상좌가 두 손을 합장하고 오방신에게 절을 하며 놀이판의 시작을 고했다. 이어 양어깨를 으쓱대며 원을 그리면서 타령장단에 맞추어 흥겹게 춤을 추며 놀이판의 액운을 물리치고 행사가 무사히 마무리되도록 비는 의식을 치렀다.

선소리 산타령패 들은 모가비가 앞산타령을 선창하고 산타령패가 소고를 들고 덤부리산 장단을 치며 중앙으로 원을 그리며 모여들어 앞산타령 뒷산타령, 자진산타령을 좌우로 돌며 신명나게 불렀다.

이어 소무춤 패가 화려한 춤동작이 선보였다. 소무는 양쪽에서 10명씩 줄을 서서 중앙으로 20보씩 전진했다가 후진하기를 반복하며 두 손을 어깨높이까지 들어 올려 좌우 양쪽으로 손을 돌리고 손바닥을 아래위로 뒤집어가면서 타령장단에 맞추어 흥겹게 춤을 췄다.

수표교다리밟기 과장의 백미는 왜장녀 춤과 곤나쟁이 춤이었다. 구경꾼들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구경꾼을 향해 익살떠는 왜장녀의 얼굴 표정, 몸짓 하나 하나에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웃음꽃을 선사하는 왜장녀의 인기는 놀이판을 절정에 치닫게 했다. 곤나쟁이는 왜장녀의 춤을 구경하느라 안으로 몰려든 구경꾼들을 막대기로 장내 정리하면서 함께 춤도 추며 놀음판의 흥을 돋웠다.

이어 모가비가 판을 넘기면 선소리패가 가운데로 원을 그리며 모여들어 좌우로 돌면서 방아타령, 자진방아타령으로 넘어갔다. 선소리 패는 본문을 메기고 앞으로 나갔다가 뒤로 빠지면 양쪽 별감, 집사, 무동, 소무, 왜장녀, 곤나쟁이, 양반은 후렴을 받으며 중앙으로 들어왔다가 뒤로 나가기를 반복하다가 경복궁타령을 부르며 판이 마무리됐다.

마지막으로 뒷놀음과 길놀이가 이어졌다. 선소리패의 소리가 끝나고 무동을 태운 놀이패가 모두 가운데로 들어와 구경꾼들과 어울려서 한바탕 신명나게 논 다음 본기를 선두로 입장순서로 다리 위를 두 바퀴 돌아 내려오며 모든 놀이판이 끝났다. 놀이의 마무리 무렵에도 구경꾼들의 박수소리에 놀이패들의 흥은 계속 이어졌고 구경꾼들은 환호와 박수로 한동안 자리를 떠날 줄을 모르고 놀이패의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까지 구경했다.

추석연휴를 맞아 아들(김민준, 7세)을 데리고 부평에서 구경 온 조현미씨는 “서울시내 여러 축제들을 둘러보고 오는데 마침 다리밟기 민속놀이공연을 보게 됐다.”며 “아이가 풍물놀이를 좋아하고 양반이 신은 신발 등 공연자들이 신고 있는 특이한 신발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질문도 한다.”며 기뻐했다.

경남 창원에서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왔다는 영국인 설리반(Nick Sullivan, 창원 어학원교사)씨는 “놀이 규모가 매우 크고 아름답다. 어떤 놀이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전승놀이라는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용도 재미있고 놀이 모습도 인상적이다.”라며 감탄했다.

양반부인 역으로 공연을 한 우초향(여, 80세)씨는 “10여 년째 다리밟기놀이 공연에 참가하고 있다. 춤과 소리가 좋아 공연 때는 아무리 아파도 아픈 줄도 모르게 싸악 다 나아버린다.”며 “다니던 학원이 다른 곳으로 옮겨져도 선생님을 따라가 춤과 소리를 꾸준히 배우고 있다.”며 선생님을 소개하고 사진을 찍기를 부탁했다.

작년까지 가무별감 역으로 10여년이상 공연에 참가했던 김경준(남, 86세. 망우리 거주)씨는 “나이가 들으니 힘이 들어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줬다.”며 수표교에 대해 “옛날에 다리밟기하던 수표교가 지금 청계천에는 없고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정월 대보름 밤에 건강과 복을 바라며 하던 다리밟기가 놀이화 된 것은 옛날에 왕이 수표교다리를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고 기왕이면 흥을 돋우는 놀이를 끼워 넣으라고 해서 된 것이다.”며 친절하게 설명했다.

다리밟기는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서 전해져온 풍속이다.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모여서 개천위에 놓인 다리를 밟는 일종의 세시적인 대동행사지만 그 내용은 놀이성이 강하게 작용하므로 이를 답교놀이라고도 부른다. 일 년 중 정월 대보름날 전후 밤에 행해지는데 사람들은 이 때 다리를 밟으면 일 년 내내 다리 병을 앓지 않는다고 믿었다.

다리밟기풍속은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金邁淳의 열양세시기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誌) 등에 기록돼 있다.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誌)에 의하면 “서울 사람들은 달이 뜬 후 모두 종가(鐘街,지금의 종로)로 나와 종소리를 듣고 헤어져서 여러 다리를 밟으려고 대광통교, 소광통교 및 수표교에 가장 많이 모인다.”고 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정월 상원조>에는 서울 풍속으로 수표교水標橋와 광교廣橋에서 행해졌던 다리밟기를 기록했다. 특히 이번 수표교 다리밟기 놀이는 양반다리밟기 놀이라는 특징이 있다. 최상수의 한국세시풍속韓國歲時風俗에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일부 양반들은 서민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다 하여 하루 앞서 음력 열 나흗날 밤에 행하기도 하였으니 이를 ‘양반다리밟기’라 하였다.”라는 기록에서 수표교 다리밟기의 유래를 확인할 수 있다.

▲ 광통교
▲ 원 수표교

수표교는 총길이 27m, 너비 7m의 아름다운 다리였다. 다리앞쪽 하천바닥에 10척까지 눈금을 새긴 돌기둥을 세워 불어나는 물을 측정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수표교와 광교는 조선말까지만 해도 정초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다리밟기를 하였다. 특히 수표교 다리밟기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너 나 할 것 없이 참여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어 다리밟기 풍속은 자연스럽게 축제로 발전하였다. 참여자들의 흥을 돋우고 여흥판을 조성하기 위해 악·가·무를 동반한 전문재비(악가무 기능자)들을 불러 연희들이 가미됐다. 볼거리와 놀거리를 위해 소리꾼·춤꾼·풍물꾼이 참여하여 전문적인 소리와 춤·대동놀이를 곁들이게 된 것이다. 행사가 전문화되자 다리밟기는 정형화된 연희演戱로 정착됐다. 놀이형식이 세분화되어 집사·상좌·무동·왜장녀·곤나쟁이·산타령패·악사·양반 등의 배역을 정해두고, 각자의 맡은 역할로 소리나 춤의 연희를 이끌어 나가는 형식으로 발전했다. 1925년 서울에 닥친 홍수로 많은 피해를 입게 되자 장안의 많은 민속연희들이 사라지고, 일제강점기에는 전통연희 전승활동이 어려워 한동안 맥을 이어가지 못했다.

1969년 수표교 다리밟기가 한국민속연구회 주도로 재현됐으며 이 작업은 김천흥(1909-2007)·허호영(1914- ?작고)·이충선(1901-1989, 1973년 송파산대놀이 기능 보유자지정, 악사) 등이 고증하여 명동에 있었던 국립극장 실내무대에서 처음으로 공연됐다. 1970년 정월 대보름에는 장충동에 있는 수표교에서 다리밟기행사가 복원돼 전승의 맥을 되찾게 됐다. 이후 발표공연이 9월, 10월 한가위 무렵 꾸준히 이어졌다. 1998년(제3회, 장충단공원, 참가인원 120명), 1999년(제4회, 남산골 한옥마을) 2000년(제5회, 장충단공원 수표교), 2001년(제6회, 장충단공원 수표교), 2006년(제7회, 청계천 광통교), 2011년(제8회 발표공연), 2012년(제9회 발표공연), 2014년(제10회, 청계천 광통교) 이 과정에서 박상옥(서울시 무형문화재 21호 휘모리잡가 보유자)과 박종국(현 수표교 다리밟기 소리부문 예능 보유자)의 노력이 돋보였다.

수표교다리밟기 연희팀은 민속놀이 보존 및 전승을 위한 정기공연 뿐만 아니라 지역 축제 및 전국단위 민속예술축제(1958년부터 매해 10월 개최, 민속예술 발굴, 발전 및 원형보존목적)에 참가하여 여러 차례 수상하는 등 수표교 다리밟기의 홍보 및 저변확대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1984년 10월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열린 제25회 전국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하여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2001년 10월 제42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장려상, 2006년 10월 제47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 예능(무용부문) 보유자 조춘선

‘수표교 다리밟기’는 2009년 3월 5일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40호로 지정됐다.

2011년 3월 5일에는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수표교 다리밟기 예능보유자로 박종국(소리부문 예능보유자)과 조춘선(무용부문 예능 보유자)이 지정됐다.

서울특별시 오문선 학예연구사는 무형문화재 지정 이유에 대해 “수표교 다리밟기는 서울시의 대표적 집단놀이로서 서울지역의 오래된 세시풍속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서울 토속적 연희형식을 잘 갖추고 있어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며 “청계천은 자연과 개발이 잘 어우러진 도심 속의 개천이다. 근년에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서울시민의 쉼터로 기능하고 있으며 문화광장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서울시는 수표교 다리밟기의 전통을 복원,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전승의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설명했다.

수표교 다리밟기 보존회 박종국 회장은 수표교다리밟기의 활성화와 전승을 위해 조춘선 예능 보유자와 함께 젊은 후계자들을 모아 연희 전승의 후진양성에 힘써왔다.

2012년 서울특별시 금천구 독산로 13 건물 3층에 사무실을 마련한 수표교다리밟기보존회는 2015년 9월 현재 회원수 56명으로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40호인 수표교다리밟기 연희의 계승발전을 위해 필요한 분야별 예능자를 육성하고 있다.

박종국 회장은 지난 12일 가진 인터뷰에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40호 수표교 다리밟기 보존회장으로서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 수표교 다리밟기를 널리 알리고 계승 발전시키고 싶다. 연중행사뿐만 아니라 공연을 할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마련된다면 언제든지 가서 열심히 하겠다는 욕심도 있다. 단체공연이기 때문에 인원이 많이 필요해 인원도 늘리고 분야별 전문 이수자를 늘려서 단단한 수표교 다리밟기 보존회를 만들 계획이다. 내년 10월에는 분야별로 3년 정도 수련한 전수생들(약 9명)을 대상으로 조예가 있는 심사위원들을 초빙해 이수평가를 하고 이수자를 배출할 계획이다.”라며 포부를 밝혔다.

한편, 수표교(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18호, 1973년 지정)는 현재 장충단 공원 입구에 놓여 있는 돌다리로 원래는 청계천2가에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다리 옆에 서있던 수표는 다리를 이곳으로 옮길 때 함께 옮겨왔다가 1973년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세종 2년(1420년) 청계천에 처음 놓인 수표교는 당시 소시장이 있다하여 마전교馬廛橋라 불렸던 총 길이 27m, 너비 7m의 아름다운 다리였다. 화강암을 짜 맞추어 만들어 놓은 것으로 아래의 돌기둥이 특이하게도 2단을 이루고 있다. 그중 윗단의 돌은 모서리를 물의 흐름과 마주하게 하여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하였다. 난간은 연꽃봉오리, 연잎을 주제로 설계해 놓았는데 그 조각들이 매우 아름답다.

수표교水標라는 이름은 세종 23년에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 측우기를 만들고 이 방법으로 하천의 수위를 측정하기위해 설치한 것이 수표다. 이 당시의 수표는 낮은 돌기둥 위에 나무기둥을 세운 형태로 촌 푼까지 세밀하게 측정하였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청계천 수표는 성종(재위 1469-1494)때 다리 앞쪽 하천바닥에 돌기둥(수표 보물 838호)을 세워 1척(21cm)마다 1척에서 10척까지 눈금을 새긴 돌기둥(수표 보물 838호)으로 개량한 것으로 높이 3m, 폭 20cm의 화강암 사각 기둥으로 만들었다. 위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삿갓 모양의 머릿돌이 올려져 있고, 밑에는 직육면체의 초석이 땅속 깊이 박혀있다.

영조 36년(1760년)에는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경庚진辰지地平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어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했다. 이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붙여진 이름이 수표다. 이 수표가 세워져 있는 다리라고 하여 수표교라고 불렸다. 수표교는 물길을 건너는 통로로서 뿐만 아니라 홍수조절을 위해 물수량을 재는 역할을 했던 중요한 다리로 조선 500여년 동안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왔다.

보름 명절 가운데서도 정월 대보름과 추석은 가장 큰 명절이다. 대보름은 신년에 처음 맞는 명절이어서 중시되고 추석은 수확기가 시작되는 시기의 보름 명절이어서 중시된다. 이러한 명절세시풍속은 우리 조상들의 다양한 생활상과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현대 사회풍속의 변화로 점차 명맥이 끊어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수표교 다리밟기놀이가 한국 민속축제에서 큰상을 받아 영구보존가치가 있는 서울지역의 독보적인 놀이로 인정받고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될 수 있어 다행이다.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꾸준히 발굴하는 일은 우리 후손에게 민족의 정체성을 심어 줄 수 있는 고귀한 일이며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기자주: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서울시 관계자와 박종국 수표교 다리밟기 보존회장, 보존회 이연옥 총무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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