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근대적 사고, 조심태의 책임현장을 들여다 보다

▲ 강의를 열심히 수강하는 청중

17일(목) 오후 7시, 광교 홍재도서관 2층 세미나실에서 “사람. 수원 화성을 열다.”라는 주제로 경기대학교 건축학과 정정남 교수가 인문학적·건축공학적 시각으로 수원화성을 바라보고 건설과정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과 인물(조심태)을 조명해 정조의 근대적 사고와 조심태의 책임현장을 강의했다.

오랜 역사와 세계문화 유산이 살아 숨 쉬는 수원·화성의 건설은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을 천장하는” 일로부터 비롯되었다.

<영조실록> 1762년 윤5월13일에 “세자가 집영문(集英門) 밖에서 지영(祗迎)하고 어가를 따라 휘령전으로 나아갔다. 임금이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서 사배례(四拜禮)를 마치자, 임금이 갑자기 손뼉을 치면서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貞聖王后)께서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사이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세손이 들어 와 관(冠)과 포(袍)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김성응 부자(父子)에게 수위하여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정치를 대하는 두 사람의 자세로 야기되는 게 ‘임오화변’이다.

▲ 강의를 열심히 하는 건축학과 정정남 연구교수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서인하고 세손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했다. 사도세자의 무덤은 사도묘(思悼墓)로 강등했다. 조선시대 무덤의 제도는 능(陵)은 왕과 왕비, 원(園)은 왕세자와 왕의 사친, 묘(墓)는 능원(陵園)이외의 모든 무덤을 말한다.

정조가 결정한 사도세자의 무덤자리는 현재 서울시립대(배봉산)에 있던 곳에서 수원부 관아 뒤쪽의 땅으로 이전이었다. 이것이 현륭원의 조성과 구읍치(舊邑治)가 이전을 해야 했다.

지형은 만들면 되지만 그 지역에 살던 백성이 문제였다. 정조는 이 과정에서 백성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경제적 보상을 약속했다.

규모가 작았던 구읍에 비해 신읍에는 새로운 관아건물이 들어서고 관아, 객사, 향교와 사직단은 물론 현륭원 전배를 위해 행행할 때 왕의 행차가 머물기 위한 행궁도 지어야했다. 수원 신읍의 주산인 팔달산을 배경으로 동향해서 배치되었는데 이는 기존의 고을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고을은 북쪽에 자리한 주산을 배경으로 하고 동서를 관통하도록 도로를 내어 그 북쪽에 관아를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관아는 볕이 잘 드는 남향을 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원은 동향을 하고 있었다. 이는 신읍 수원의 중심부를 한양에서 호남지역을 잇는 도로가 관통하고 있었으며 고을의 주산인 팔달산이 북쪽이 아닌 서쪽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의 보상을 받고 삶의 터전을 옮긴 수원의 백성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정조는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수원에는 대규모의 시설(관아, 객사, 향교, 군영시설건설)역사가 이뤄지고 “수원부사로 있던 조심태”는 구체적인 상업정책(낮은 금리로 수원백성에게 대출)을 내놓았다. 1792년 수원 중심도로변에는 입색전(비단가게), 어물전(생선, 과일가게), 목포전(무명, 모시, 목화가게), 미곡전(쌀, 담배, 국수), 관곽전(장의), 지혜전(종이, 신발), 유철전(놋쇠와 쇠를 다루는 가게)등이 즐비하게 활기를 띠었다. 1793년 정조는 도회지로 성장한 수원을 화성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수원읍치가 번성하자 1793년 12월 정조는 그곳에 성 쌓기를 결정하고 공사 담당자를 임명했다.

성곽이 불규칙한 형태가 되더라도 이미 건축된 여염(閭閻)을 성안으로 들여 그들의 안전과 잃을 경제적 손실을 미리 읽고 백성을 위하겠다는 근대적인 사고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마침 계획하고 있던 화성 성역건설은 성곽제도와 공역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박제가는 벽돌을 활용하자.”정약용은 배다리 설치에 따른 한강의 지형과 선박제도 정비와 효율적인 공역을 위한 거중기나 유형거(수레)를 고안했다.

▲ 불규칙한 화성 형태의 결정
▲ 조심태(1740 ~ 1799)인물 설명

현장의 중심은 화성공사 감동당상에는 비변당상 조심태를, 사무를 총괄하는 총리대신에는 채제공을 임명했다.

조심태는 어떤 사람이기에 정조가 이토록 중요하게 여겨 공사의 실무책임을 맡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조심태는 조선시대 무반 가문 가운데 7번째로 많은 인원을 무과급제를 배출한 평양 조씨 집안에서 성장했다. 평양 조씨 가문은 수원 인근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살던 집안이다.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렴하거나 인근 지역의 정보를 얻는 등 지역사회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어려운 일을 수월하게 진행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수원성 공역에 들어 갈 경비를 마련하는 문제, 공사를 효율적으로 이끌어 갈 사람을 구하는 문제, 석재발굴의 가능성, 변방 수령직에서 얻어진 축성에 대한 의견 등 공사기간이 10여 년을 생각했으나 적임자인 조심태의 공로로 2년 6개월에 완공했다.

화성은 석성으로 축조된 성이지만 돌만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성벽은 돌로 쌓고 포루나 공심돈 등 새로운 방어시설은 흙을 구워 만든 전돌(벽돌)로 쌓았다. 화성공역은 여태까지의 국가공사와는 달리 모든 공정에 참여하는 장인과 모군들에게 품삯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근대적 사고, 도로노선에 맞추어 도시의 좌 향을 결정해 전통적인 틀을 깼다. 새로운 방어시설로 거주민이 생활하는 읍성과 방어성으로 기능을 겸비했다. 지형의 굴곡에 따라 산지대에는 산성처럼 쌓고, 평지에서는 읍성을 쌓아 그 안으로 도시가 수용 될 수 있도록 계획했고 화성은 고구려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돌로만 축조하던 성곽 건축기술이 진일보했다.

▲ 구읍치와 신읍치 비교

따라서 18세기 신도시 화성은 철저한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로 그 주변은 읍성과 산성을 단일 화 한 성체로 둘러싸고 성곽에는 새로운 방어시설을 갖춘 획기적인 곳이다.

이와 같은 화성의 건설은 정조의 근대적 생각과 실무에 능한 조심태라는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화성의 대부분시설이 파괴됐지만 “화성 성역의궤”가 있었기에 다시 복구되었다. 그리고 1997년 수원화성의 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권선동에 사는 어르신은 석재 채굴에 숙지산, 여기산, 팔달산, 권동이 있는데 권동은 이해가 안가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교수는 더욱 연구를 해봐야 되겠지만 다르게 표현하기는 어렵다고 대답을 했다.

광교에 사는 어르신은 폐서인이 된 장희빈 묘역에 석물이 많이 갖춰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수께서는 최근에 보완하면서 꾸며진 것 같고 위치도 정확하지 않아서 연구가 필요하다고 대답을 했다.

이 교육을 통해서 우리는 사업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황을 대처할 때 우선 백성을 이해하고 생각하며 계획을 잘 세워 실천한다면 수원·화성을 정치적·물리적 유산이 아니라 사회적·철학적 유산으로 인식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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