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중심/행복한 이야기(13)

‘오늘은 3561번째 빨래하는 날입니다.’

“뭔 소리야? 3561번째 빨래하는 날이라니... 뭐? 3561번째 공연이라고?” 그렇다.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공연으로 세상에 선보인 ‘빨래’는 2005년 국립극장에서 기획한 ‘이성 공감 2005’를 통해 대중을 만났고, 단 2주 만의 공연으로 제11회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작사/극본상을 수상했다. 대학로 동양예술극장에서 뮤지컬 ‘빨래’가 공연 중이었다.

 

서점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나영과 몽골 이주노동자 솔롱고를 중심으로 서민들의 팍팍한 인생살이를 그려낸 ‘빨래’. 주변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진솔하게 그리며 공감대를 형성,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아름다운 음악, 비정규직 부당해고, 이주 노동자 차별 등 사회문제까지 담아낸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작품이다.

 

슬플 땐 빨래를 해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시간이 흘러흘러 빨래가 마르는 것처럼

슬픈 니 눈물도 마를 거야

자 힘을 내

 

슬픔도 억울함도

같이 녹여서 빠는 거야

손으로 문지르고 발로 밟다보면 힘이 생기지

깨끗해지고 잘 말라서 기분 좋은 나를 걸치고

하고 싶은 말 다시 한 번 하는 거야

- 희정엄마, 주인할매, 나영

 

18차 프로덕션 진행 중..

2005년 1차 프로덕션부터 2016년 17차 프로덕션까지... 10주년, 3,000회가 넘는 공연 횟수, 50만 명이 넘는 관객 등 숫자가 그 위력을 증명한다. 거기에 2012년, 2015년의 일본과 2016년 1월 중국에 진출한 바 있고, 금년 8월부터 약 4개월 동안 또 한 번의 중국 초청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한국 디자인이 그대로 적용된 무대와 한국 배우, 한국어 대사에 중국어 자막을 띄웠다. 일본 무대도 최소한의 번역과 한국어 간판, 한국식 소품을 사용했다. 대한민국 창작 뮤지컬 라이선스 공연이다.

 

달려온 10년을 돌아보며 달려갈 미래를 고민해야 했다. 2016년 3월부터 2017년 2월까지의 약 1년간 18차 프로덕션 무대를 진행하고 있는 ㈜씨에이치 수박은 공연 예술의 힘을 믿는 젊은 창작 집단이다. 음악적 성격이 강한 공연을 주로 하고 있는 씨에이치 수박의 공연 철학은 ‘공감’과 ‘위로’다. 따뜻한 시선으로 관객과 소통하며,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할 수 있는 힐링극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빨래’가 힐링 뮤지컬인 이유다.

 

뮤지컬 넘버는 모두 15곡

‘서울 살이 몇 핸가요’, ‘나, 한국말 다 알아’, ‘안녕’, ‘어서 오세요 제일서점입니다’, ‘자, 건배’, ‘내 이름은 솔롱고입니다’, ‘빨래’, ‘내 딸 둘아’,‘비 오는 날이면’, ‘책 속에 길이 있네’, ‘자, 마시고 죽자!‘, ’한 걸음 두 걸음‘, ’아프고 눈물 나는 사람‘, ’슬플 땐 빨래를 해‘, ’참 예뻐요‘ 등 뮤지컬 넘버는 모두 15곡. ‘서울 살이 몇 핸가요’를 처음과 끝의 합창으로 부른다. 주인할매와 희정엄마, 나영이 함께 하는 3중창과 나영, 솔롱고가 부르는 2중창이 멋지다. 그러나 백미는 주인할매의 쏠로 ‘내 딸 둘아’였다.

 

“오늘은 똥 푼 날이여. 5천원씩 내면 되여.”. 세입자들을 다그치면서 사생활에 은근슬쩍 끼어드는 주인할매. “희정 엄마! 드나들던 남자 중에 지금 구 서방이 그래도 제일 낫구먼. 궁둥이 붙이고 잘 살어봐. 히히.” 주인공은 나영과 솔롱고인데, 엉뚱한데서 감흥이 온다. 하긴 조연이 작품을 빛내는 영화, 연극이 많으니께.

 

달동네에서 방세를 받아 근근이 살아가는 주인할매가 빨랫줄에 기저귀를 넌다. 생리대가 나오지 않았던 시절 여성들이 착용했던, 그런 커다란 기저귀다. 사십이 된 정신지체1급 장애를 가진 딸 ‘둘’이와 둘이 산다. 바깥세상 구경 한 번 못하는 딸을 위해 “나보다 하루만 먼저 갔으면,..”이라며 빨래를 치댄다. 정 많은 주인할매의 구성진 솔로에 가슴이 찡하다.

 

내 딸 둘아

 

지겨운 기저귀, 벌써 사십년 째여

마흔이 다 되도록 기저귀 신세를 못 면한

내 딸 둘아! 너도 건넛방 처자처럼

알록달록 치마도 입고 구두도 신고 싶것지

내 딸 둘아! 너도 희정엄마처럼

남자 만나 아이 낳고 아옹다옹 살고 싶것지

 

그러나 어쩌것냐 이것이 인생인 것을

 

얼룩 같은 슬픔일랑 빨아서 행궈버리자

먼지 같은 걱정일랑 털어서 날려버리자

네가 살아 있응게 빨래를 하는 것이제

내가 아직 살아 있응게 빨래를 하는 것이제

 

요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잉게 암씨랑도 안허다

요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잉게 암씨랑도 안허다

 

 

우리 소풍가요. 대학로로...

6월 25일 토요일 오전 11시 30분. 수원 광교노인복지관(관장 이동훈) 앞에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서울 대학로로 뮤지컬을 보러 간다. 지난 4월부터 시작된 ‘연극반’의 첫 나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차에 오른다. 마치 소풍가는 유치원생처럼... 버스까지 노란색이라니. 하하.

 

동수원IC로 진입하여 고속도로를 달린다. 햇살도 쨍하고 버스 안 여인들의 수다(?)도 쨍하니 곰살맞다. 살구나무가 보이더니 이내 한강이 흐르고 남산터널을 지난다. 청계천은 점심식사를 마친 직장인들의 쉼터. 한 시간 여 만에 대학로에 도착, 구수한 청국장으로 보리밥을 쓱쓱 비빈다. 여유로운 시간 덕분에 차도 마시고 덕담도 나눈다. 15분 전 입장, 만석이다.

 

무대에는 어린 아기의 옷들이 빨랫줄에 널려 있다. 슈주(슈퍼주인)가 등장 관객과 인사를 나눈다. 관람예절 몇 가지를 안내하는데 좌우로 자막이 뜬다. 중국어다. 오늘은 중국 여행객들이 관람을 온 모양이다. 무대가 열린다.

 

서울 살이 몇 핸가요?

 

서울 살이 몇 핸가요? 서울 살이 몇 핸가요?

언제 어디서 왜 여기 왔는지 기억하나요?

서울 살이 몇 핸가요 서울 살이 몇 핸가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 있었는지 마음에 담고 살아가나요?

 

(중략)

-나영

서울 살이 오년, 여덟 번째 직장

아니, 아홉 번인가

연애는 두 번

차인 게 한 번, 심하게 차인 게 한 번

사랑하다 남은 건 쓰다 남은 콘돔

 

서울 올 땐 꿈도 많았는데

삼사년 돈 벌어 대학도 가고

하지만 혼자 사는 엄마한테 편지 한 줄 못 쓰는

 

내 꿈은... 내 꿈은 ...

나의 꿈 닳아서 지워진 지 오래

잃어버린 꿈

어디, 어느 방에 두고 왔는지

기억이 안 나요

 

서점에서 16년을 근무한 선배가 부당해고에 직면하자 의리를 발동하는 나영. 비정규직 그들은 서러움을 소주에 말아 들이킨다. “사장 욕할 땐 술만한 친구가 없고(쫄딱 망해라!), 소주 안주엔 삼겹살만한 안주가 없고(길가다 넘어져라!), 삼겹살은 제주 똥 돼지가 최고(빵하고 터져라!). 자, 마시고 죽자!...”.

 

스물 아홉 나영이 집으로 가는 길은 멀기도 멀다. “한 걸음 두 걸음 혼자 가는 이 길 끝 내 방에 누구 하나 기다렸으면.. 세 걸음 네 걸음 오늘 같은 날엔 우리 엄마 물김치 택배가 기다리고 있었으면..”.

 

희정엄마와 주인할매가 희망을 노래한다. “뭘 해야 할지 모를 만큼 슬플 땐 난 빨래를 해. 둘이 기저귀 빨 때 / 구씨 양말 빨 때. 내 인생이 요것 밖에 안 되나 싶지만 사랑이 남아 있는 나를 돌아보자. 살아갈 힘이 있는 우릴 돌아보자.” 자 힘을 내. 어서!

 

솔롱고가 나영에게 다가온다. “참 예뻐요 내 맘 가져간 사람. 참 예뻐요 당신 마음 나도 알아요. 참 예뻐요 나와 닮은 사람. 빨래처럼 흔들리다 떨어질 우리의 일상이지만, 당신의 젖은 마음 빨랫줄에 널어요. 바람이 우릴 말려줄 거예요. 당신의 아픈 마음 꾹 짜서 널어요. 바람이 우릴 말려 줄 거예요.”. 달동네 사람들이 그들을 축복한다. “털털 털어서 널어요 우리가 말려 줄께요. 당신의 아픈 마음 우리가 말려 줄께요. 우리가 말려 줄께요.”.

 

 

대한민국 창작뮤지컬 라이선스..

공연은 두 시간. 지루할 틈 없이 지나갔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진솔하게 그리며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다. 관객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엿보였다. 대한민국 창작뮤지컬 라이선스로 일본과 중국에 진출했음도 큰 성과다. 그런데 뭔가 미진했다. 뭐지?

 

웃음과 감동의 균형이 깨져 있었다. 재미에 치우친 무대를 보며 깊은 감동을 받지 못했다. 잠시 잠깐 애잔한 장면은 있었지만. 대학로의 수많은 극장들이 대부분 그런 작품들을 올리기에 발길을 끊고 있었던 나를 발견한다. 쉽게 말해 너무 상업적. 가슴깊이 울림을 주는, 사유의 골이 깊은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관람료도 만만치 않은데. 대학로의 수많은 소극장들이 줄줄이 문 닫게 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슬슬 나오고 있는 이유이지 않을까.

 

여덟 명의 배우 중 주인공을 제외한 거의 모두가 1인 다역을 하며 출연했다. 무대 뒤의 긴박감이 그려진다. 짧은 시간에 옷을 갈아입고 다른 캐릭터에 몰입해야 하는 일이 버거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역을 잘 소화해냈다. 정작 문제는 주인공에게서 나왔다. 한마디로 울림이 없었다. 잘 우려낸 설렁탕의 깊은 맛이 아니었다. 여배우가 예뻐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캐릭터는 깨진다. 영화에서도 수없이 느끼는 잔상이다. ‘빨래’도 그랬다.

 

오페라.. 웬지 어렵다. 그런데 뮤지컬은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브로드웨이에서 흥행한 세기의 뮤지컬들이 홍수처럼 들여졌다. 레미제라블, 지킬 앤 하이드, 캣츠, 오페라유령, 미스사이공 등을 보며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창작뮤지컬의 출현이 기다려진다. 달동네의 일상이 사뭇 대한민국의 현실 이미지로 비춰지지 않을지 염려되는 건 기우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연극반의 첫 나들이는 가히 성공이다. “연극에 한 발자욱 다가선 느낌이다.”. “시원했다.”. “재미졌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만족하며 작품 분석을 쏟아냈다. 연극배우 초보생 우리에게 자양분이 되어준 것이 매우 분명했다.

 

“뭣이 중해, 뭣이 중허냐고! 뭣이 중한지 아름서?” “알지. 우린 아직 어린애여. 소풍가는 유치원생이여. 허지만 살아온 세월만큼 연륜을 녹여낼 수 있는 용광로인 걸 모르남? 일상이 연극이제. 어쩌것냐 인생이 연극인 것을.” 그렇다. 시니어는 설렁탕 진국 맛을 잘 우려낼 수 있다. 하하.

연극반의 소풍, 뮤지컬 ‘빨래’의 관람은 이재홍 강사와 김미경 복지사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광교노인복지관 연극반 동아리

‘A New Life’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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