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중심/행복한 이야기(14)

 

전무송, 박정자, 손숙, 정동환, 김성녀, 유인촌, 윤석화, 손봉숙, 한명구.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도 무대의 깊이를 달라지게 하는 아홉 분이 한 무대에 섰습니다.

〈햄릿〉, 한여름 밤의 설렘이었습니다.

2016년은 이해랑 탄생 100주년이자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인생을 연극으로 채워 온 아홉 분의 연기경력 400년이 녹아들었습니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있기 힘든 만남이 이뤄진 것은 아홉 분의 마음속에 품고 있을 ‘이해랑’이라는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모두가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입니다.

‘큰 바위 얼굴’ 이해랑 선생

이해랑 선생은 삶의 행적에서 흠결을 찾아볼 수 없는 인물입니다. 험난한 역사에 국척(跼蹐)하지 않으며 의연하게 정도를 걸을 수 있었던 드문 경우입니다. 식민지시대에는 연기자로서만 활동했기에 군국주의에 아유(阿諛)할 필요가 없었고, 20대부터 신문잡지에 글을 쓰면서도 순전히 연극본질에 관해서만 언급했으며, 연극계의 리더로서 번역극과 창작극을 조화시키는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선생은 1950년 국립극장 개관 당시 전속극단 신협의 단원이었고, 이후 단장을 맡아 신협을 이끌며 이 땅의 연극과 국립극장의 역사를 이뤄냈습니다. 한국 연극의, 더 나아가 문화예술계의 거인이었습니다.

▲ 무덤지기 역 '한명구'의 열연

연극계의 사건이자 기록, 그리고 축제가 된 〈햄릿〉

공연은 지난 7월 12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016년 8월 7일 늦은 7시 30분. 국립극장 해오름, 마지막 공연장에 들어섰습니다. 잠시 후 모든 불이 꺼졌습니다. 플로니어스 역의 박정자가 등장합니다. 관객이 들어왔던 그 길입니다. 희끗희끗한 단발머리에 특유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무대를 장악합니다. 모노드라마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보았다'의 박정자가 스칩니다. 그의 손끝을 바라봅니다. 오늘은 관객 모두가 무대에 올라 와 있기에 가까이서 배우를 만납니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햄릿 역의 유인촌은 여섯 번째 햄릿을 맞이합니다. 이순(耳順)을 넘긴 나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이에 햄릿을 연기하는 배우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쳤지만 미치지 않기도 하고, 귀족적이지만 상스럽기도 하고, 군인이자 철학자이기도 한 햄릿의 다양함과 양면성에 대한 디테일한 연구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인생을 꾹꾹 눌러 담은 연기가 폭발합니다. 연극을 꾹꾹 눌러 담은 인생을 펼친다고 해야 할까요. “죽느냐 사느냐...”의 방백이 가슴을 파고듭니다.

▲ 햄릿과 어머니의 고뇌. 햄릿 역의 유인촌과 어머니 거트루드 역의 손숙

나이 듦의 열정과 패기가 감동으로 느껴지다

레어티즈 역의 전무송은 ‘좋다’라는 감정을 넘어서 ‘황홀함’으로 햄릿에 매료됩니다. 〈햄릿〉을 번안한 〈하멸태자〉라는 작품을 공연한지 50여 년이 지나 또 한 번 햄릿을 만났습니다. 전무송의 연기는 연륜 그 자체였습니다. 고스란히 보듬습니다. 그 동안 쌓아 왔던 연기의 지표가 새롭게 정립되었다는 김성녀는 호레이쇼 역으로 햄릿과 지근거리를 유지합니다. 마당놀이에서 많이 봐 왔는데, 이제 장르를 넘나드는 큰 배우입니다.

적당한 기술로 채울 수 없는, HAMLET

정동환은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형을 죽이고, 형수를 아내로 삼는 극악의 클로디어스 역으로 복수의 대상입니다. 어미로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 거트루드 역의 손숙은 “시험을 앞둔 수험생마냥 긴장하고 노력했으며, 행복한 연습이었다”고 말합니다. 윤석화는 오필리어의 맑은 영혼, 그리고 사회와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어가는 과정에 혼신을 다합니다. 적당히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 플로니어스가 등장하여 한 사람씩 불러내는 형식으로 아홉 명 모두가 무대에 오른다. 폴로니어스 역의 박정자.

“아, 뒤틀린 세상.”

죽음의 유령이 햄릿을 찾아와 진실을 들려줍니다. 이 대사의 영어 원문은 “Time is out of joint.”로 시간의 흐름에 채워진 빗장이 풀렸다는 뜻. 햄릿이 사는 삶의 시간과 유령이 사는 죽음의 시간이 섞였다는 뜻도 됩니다.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와 ‘지금 여기’의 우리 시대가 뒤섞입니다. 햄릿은 권력을 탐하지 않고 죽음에 천착했습니다. 지상에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려도 죽음은 예정된 것이라는 상기입니다. 메멘토 모리.

무대에서는 허구를 연기하지만

배우는 항상 진실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평균 연령 66세의 배우들은 성별 불문, 연령 불문, 시대 불문, 기타 등등 불문의 것들을 담아냅니다. 햄릿의 친구 로젠크란츠 역의 손봉숙, 그리고 운명적으로 마지막에 햄릿 호에 승선한 한명구의 무덤지기 역도 명장면입니다. 역시 연극계의 거장들!

어느덧 막이 내리고...

아니 막이 올라갑니다. 또 한 번의 감동입니다. 막이 올라가자 객석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객석... 배우 아홉 분이 그곳을 향해 걷다 다시 뒤돌아서 무대에 오릅니다. 한 분 한 분 깊숙이 인사합니다. 연륜이 설렘으로 다시 물결을 이룹니다. 기립박수가 그칠 줄 모릅니다. 배우들의 등장은 관객의 등장과 같은 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흩어져 나오는 빛이 그림자를 만들었습니다. 조명도 음악도 결코 과하지 않은 은은함이었습니다.

“연기하지 말라!”

손진책 연출은 배우들에게 “연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직 ‘연기’로 승부를 보겠다”는 연출가의 말이 엉뚱하다 면서도 그 뜻을 이해함이 분명한 배우들. 매력적인 아이러니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오랜 연륜의 예술가들도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서는 그토록 설레었다고 합니다.

극작가 배삼식은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상당한 개작의 흔적을 보입니다. 5막 극을 2막으로 축소하며 많은 인물과 대사를 생략하고, 변경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변화들로 원작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 텅 빈 객석, 관객모두 무대에 올라 공연을 관람했다.

“다시 이런 무대를 만날 수 있을까.”

프로듀서 박명성의 일성입니다. “연극쟁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추억으로, 언제든 불러내기만 하면 나를 즐겁게 만들 추억이다. 꿈을 꾸는 듯,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배경을 평면화하고 연기를 입체화하여 무대의 맨살을 드러낸 무대디자인... 텅 빈 객석은 인간세상이었습니다.

빈 무대의 언저리는 관객이 채웠습니다.                                      연륜이 설렘을 안겨 주었습니다.                                             다시 빈 무대가 되었습니다.

▲ 연극 '햄릿' 포토존에 선 필자.

햄릿 Synopsis

덴마크 왕국 수도의 엘시노아 성. 햄릿은 부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있다. 어머니 거투르드와 숙부 클로디어스의 재혼으로 더욱 혼란에 빠진 햄릿은 믿음직한 친구 호레이쇼로부터 죽은 부왕의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말을 듣자마자 아버지의 죽음에 비밀이 있음을 직감한다. 마침내 유령을 만난 햄릿은 부왕이 동생 클로디어스에게 독살되었음을 듣게 되고, 유령은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를 당부한다. 햄릿은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고 살해 당시의 내용을 담은 연극을 클로디어스에게 보여준다. 독살 장면이 나오자 퇴장해버리는 클로디오스, 햄릿은 망령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다. 복수하려던 햄릿은 실수로 연인 오필리어의 아버지 플로니어스를 죽인다. 햄릿에게 버림받고 아버지의 죽음까지 알게 된 오필리어는 충격으로 죽음을 맞는다. 아버지와 누이를 잃은 레어티즈는 햄릿을 죽이려 한다. 왕은 레어리즈와 햄릿의 검술 시합을 마련하고 독을 바른 칼과 독약이 든 술을 준비한다. 독주는 거투르드가 대신 마시고 레어티즈와 햄릿 모두 독이 묻은 칼에 찔려 치명상을 입는다. 햄릿은 독주가 남아있는 술잔을 들고 숙부에게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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