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권선구 화서동에 있는 ‘축만제’와 서호공원 산책

지난 19일 코로나 19 재확산과 계속되는 무더위로 지친 마음을 달랠 겸 아침 일찍 수원시 권선구 화서동에 있는 축만제와 서호공원을 산책하며 역사적 배경을 탐방했다.

 

탐방은 서둔 교에서 시작해 경기 옛길 삼남 길을 따라 향미정을 들려 축만 교를 지나 축만 제 제방을 걸었다. 제방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호수가 있고 남쪽에는 서둔 들녘이 펼쳐져 있다. 제방에는 만년제표석과 200여 년이 된 7그루의 소나무가 지키고 있다.

 

경기 옛길은 역사적 고증을 토대로 원형을 밝혀 지역의 문화유산을 도보 길로 연결한 새로운 형태의 역사문화 탐방로다. 201210월 삼남길 경기도 구간 중 수원화성오산 구간이 개통되었고 20135월 삼남길 경기도 전체 구간이 개통되었다.

 

다양한 철새들이 오가며 멋진 광경을 자아내고 있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제격이다.
다양한 철새들이 오가며 멋진 광경을 자아내고 있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제격이다.

서호공원은 굵직한 나무숲들과 다양한 철새들이 오가며 멋진 광경을 자아내고 있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제격이다. 서호 안에는 인공 섬이 있는데 섬 안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아 멸종위기 야생생물과 철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축만제는 현재 농촌진흥청의 시험 답()과 인근 논의 관개용 수원 및 시민들의 쉼터인 서호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200호로 지정된 축만제는 수원 화성의 서쪽에 있어 일명 서호(西湖)라고도 불린다. 정조시대 농업개혁의 산실인 축만제만석거’(수원시 향토유적 제14)와 함께 2020318, 60여 년 만에 서호와 일왕저수지의 명칭이 원래 이름인 축만제와 만석거로 제 이름을 되찾았다.

만년교를 지나 제방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200호로 지정되어 있는 축만제 표석이 서있다.
만년교를 지나 제방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200호로 지정된 축만제 표석이 서 있다.

수원화성 축조 당시 가뭄이 들자 정조대왕이 안정된 농업경영을 위한 관개시설로 1795년에 만석거(수원시 장안구 송죽동 305), 1799년에는 축만제(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436-1)를 조성하고 황무지를 개간해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했다.

 

두 저수지는 당시 백성들의 농업 생활을 뒷받침하는 데 이바지했고, 이후 일본강점기 농업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원 농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축만제는 화성의 서쪽 여기산 아래 길이 1,246, 너비 720척이라는 당시로써는 최대 크기로 조성된 저수지다.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표석이 현재 자리하고 있다.

 

당시 정조는 수원성의 동서남북에 네 개의 호수[四湖]를 축조하였다. 1795년에 장안문 북쪽에 만석거를, 1797년에 화산 남쪽의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만년제를 축조했다. 대규모 수리시설과 둔전 개간이 크게 성공하자 정조는 만석거와 만년제의 3배 규모에 달하는 축만제를 조성하였고, 개간된 둔전에서 얻은 이익은 화성을 수리하는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삼남길 이야기, 서시의 눈썹에서 이름이 유래한 '항미정'
삼남길 이야기, 서시의 눈썹에서 이름이 유래한 '항미정'

또한 순조 31(1831) 당시의 화성 유수 박기수는 축만제 남쪽에 풍광이 아름다운 항미정(杭眉亭)을 지었다. 항미정이라는 이름은 중국 시인 소동파의 기구에서 "서호는 항주의 미목(眉目) 같다"고 읊은 데서 그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호낙조’(西湖 落照)는 수원 팔경 중의 하나였던 만큼 항미정은 예로부터 수원의 대표 장소 중 하나였다. 항미정은 1908년 조선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융·건릉을 방문하고 돌아갈 때 잠시 쉬어간 정자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축만제의 역사적 배경과 중요성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아 201611월 국제 관개 배수위원회(ICID) 집행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세계 관개 시설물 유산으로 국내 최초 등재되었다. 우리나라의 관개˅ 시설물이관개시설물이 ?ICID 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축만제가 최초다.

 

한편 정조대왕은 수원화성을 정조 18(1794) 정월 초이렛날 시작하여 34개월만인 1796910일 완공한다. 화성 축성 두 해 전인 1794년 극심한 가뭄이 전국적으로 들자 화성 공사를 중단 할 것을 명하고, 179512,666냥으로 둔전을 개발하여 5,960냥으로 만석거를 축조했다. 만석거를 조성하여 성공을 거둔 후 장용영 외영의 군영을 위해 화성에 축만제와 서둔(西屯)179810월 시작하여 17995월 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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