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산루리의 독립영웅들
수원 산루리의 독립 영웅들.

수원 산루리의 독립 영웅들을 알리려는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전시회도 지난 74일에 끝이 난 것을 연장해서 1014일까지 전시를 한다.

산루리 독립 영웅들의 활약을 보면 수원시민의 놀라운 뿌리를 볼 수 있다. 특히 올해는 이선경의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전시회를 열어 더 뜻이 깊다.

수원 박물관은 2009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의로운 기생 김향화와 2010년 수원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이선경의 구국 민단 독립운동 행적과 순국 사실을 밝혀 국가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그리고 20177월부터 경기도 독립운동 인물 발굴사업을 벌여 최종 113명의 독립운동 행적을 정리하였다. 3, 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 113명 중 먼저 15명을 국가보훈처에 포상 신청하여 2020광복 75주년을 맞아 9명이 정부 포상을 받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억눌려있던 수원사람들의 분노는 19193.1운동 이후에도 학생들의 비밀결사조직 각종 사회단체의 식민지에 대한 저항, 노동자와 농민들의 투쟁 항일 격문 배포 등이 해방을 맞는 순간까지 격렬하게 이어졌으며 그 중심에 산루리 독립 영웅들이 있었다.

팔달문 밖 산무동 거리모습.  좌 팔달문 밖 시장
팔달문 밖 산누동 거리 모습, 좌 팔달문 밖 시장.

1921421일 만 19세 여학생 이선경은 가족들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수원 구국 민단 활동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풀려난 지 9일 만의 일이었다. 희망으로 가득한 꿈을 꿀 나이에 독립을 위해 투신한 그녀의 짧은 생은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맞바꾼 숭고한 희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선 시대에 산루동’ ‘다락골로도 불린 수원의 전통 마을은 그들의 편의대로 산루리가 되었다. 일제의 수탈에 시달려온 산루리 사람들은 일제에 대항해 각자의 방법대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선경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이번 테마전이 수원 산루리 독립 영웅들의 숭고한 정신과 희생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전 수원 축구 연맹 기념촬영 1938년.
전 수원 축구 연맹 기념촬영 1938년.

1905년 철도가 개통되고 1906년 권업모범장과 수원 고등농림학교가 설립되었다. 권업모범장은 후진적인 농업을 근대화한다는 홍보수단으로 활용되었고 정조대왕의 능 행차 길을 따라 만들어진 신작로로 인해 경기 남부 농업 경제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백성을 위해 만들었던 우리 전통의 옛길은 일제가 탐욕을 채우는 수탈의 길로 바뀌었다. 1910년 국권 침탈 이후 일제는 수원의 전통사회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에 산루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광주이씨 집안의 삼 남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
광주이씨 집안의 삼 남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

산루리 출신 중에서도 광주 이씨 집안의 삼 남매인 이현경 이선경 이용성은 각자의 자리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이현경은 새로운 세상을 꿈꾼 선각자이다. 이선경의 언니로 진명여고를 졸업 19213.1운동 2주년에 도쿄 하비야 공원에서 유학생들과 만세를 부르다 옥고를 치렀다. 무산계급의 해방과 여성에 대한 인습적, 민족적 압박의 철폐를 주장한 삼월회근우회조선 여성운동 동우회에서 활동하였다.

이선경(애국장) - 목숨과 맞바꾼 조국 독립의 염원하고 독립을 목표로 한 구국 민단을 박선태 등과 결성하여 비밀리에 활동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19살 나이에 순국하였으며 이선경의 사진은 남아있지 않아 언니 이현경을 모티브로 그린 상상화이다.

이용성 - 이현경 이선경의 동생이다. 수원 청년운동의 활동가이다. 고향 수원으로 돌아와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해방 이후 수원시 의회 시의원으로 활동도 하였고 의장을 역임하였다.

박선태(애족장) - 나라를 구하고자 선봉에 나선 구국 민단 단장. 수원면 산루리 출신으로 삼일 학교 교사 이종상을 만나 국내에서 항일 투쟁을 펴기로 하고 19206월 비밀결사 구국 민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활동했다. 옥고를 치르고 수원청년회, 체육회, 신간회 등에서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김노적 - 수원 3.1운동을 이끈 핵심으로 산누리에서 태어나 수원 상업 강습소를 졸업하고 민족대표 김세환 고문과 3.1운동을 이끌었다.

일본 제국주의 반대를 외친 혁명가 차계영(애족장)
일본 제국주의 반대를 외친 혁명가 차계영. (애족장)

차계영(애족장) - 일본 제국주의 반대를 외친 혁명 수원 남창리가 본적이나 산루리에서 태어나 조선총독부 급사로 취직하여 사회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독서회 산하에서 적우회를 만들어 활동하다 수원에서 체포되었다.

김장성의 훈장증 및 훈장
김장성의 훈장증 및 훈장.

김장성(애족장) - 수원 소년 동맹회 회원으로 수원 산루리에서 태어나 수원청년동맹 산하 수원 소년 동맹의 맹원이었던 홍종근(18)19301012일 이화성 학원의 운동회가 개최되어 많은 사람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무산대중에게 격함, 노동자. 농민은 일치단결하자, 조선총독부 폭압 정치를 타도하자는 것을 외치며 격문을 살포하였다. 격문 사건으로 체포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만기 출옥을 20여 일 앞두고 임시출옥한 뒤 1개월 만에 순국하였다.

이병억(애족장) - 하와이 노동 이민에서 독립운동가로 산우리 태생 하와이로 농업 이민을 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면서 기숙사를 설치하고 문명 퇴치 운동과 자치 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이승만의 독립노선을 지지하며 로스앤젤레스 한인 교민 단을 조직 군자금을 모짐하고 나성동지회를 조직 1944년 외교 의원 부를 설치하여 이승만의 활동과 정치 노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산루동 전경 1907년 국립민속박물관. 정조의 화성 건설과 상업 진흥책으로 팔달문 밖에 남문외장이 형성 산루동은 교통의 중요한 요충지로 자리잡았다.
산루동 전경 1907년 국립민속박물관. 정조의 화성 건설과 산업 진흥책으로 팔달문 밖에 남문 외장이 형성 산루동은 교통의 중요한 요충지로 자리를 잡았다.

구국 민단의 목표

1. 국권 침탈에 반대하고 조선을 일본 제국 통치하에서 이탈케 하여 독립국을 조직할 것

2. 독립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사람의 유족을 구조할 것

조선 시대의 산루리는 지금의 수원시 중동, 교동, 영동 및 구천동 일대를 일컫는 옛 지명이다. 수원 화성이 축조된 이후 팔달산 아래 신읍치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산루리는 팔달산의 서남 자락을 끼고 형성된 마을로 산등성이 아래에 위치하여 다락골이라 불렀다. 또한 화성 축성 당시 서남쪽 방비를 위해 용도를 내고 서남각루를 지으면서 화양루라 하였는데 그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이어서 자연스레 산루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문헌 기록으로는 19세기 만들어진 화성지’ ‘방리조에서 산루동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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