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석(1842~1915) 선생의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으로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서 태어났으며 14세에 화서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의암은 민족 수난 극복의 지도이념으로 위정척사 사상을 실천한 대표적인 의병장,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구국 인재를 길러낸 교육자이다.

봄내길 2-1 코스 의암 순례길 안내가 있다.
봄내길 2-1 코스 의암 순례길 안내가 있다.

경춘선을 타고 강촌역에서 내려 문배마을 가는 길을 따라 걸으면 의암 순례길이 있다. 의암 순례길은 의암 류인석(1842~1915) 순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분의 호를 따서 붙인 봄내 길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 태조 때 봄이 빨리 오는 고을이라는 뜻으로 춘주(春州)라고 하였다가 조선 태종 때는 봄이 빨리 오는 내라는 뜻으로 봄내로 불리었고 봄내를 한자로 옮기니 자연스레 춘천이 되었다고 한다. 춘천의 한글 이름에서 따온 봄내 길이다. 이곳에서 출발하면 남면 가정리 의암 류인석 유적지가 종료지다. 이 길을 걸으며 의암 류인석 장군과 의병들의 나라 사랑 정신과 백절불굴의 충의 정신을 배울 수 있다.

의암 기념관에는 '민족의 지도자 의암 류인석 선생의 흉상'이 있다. 그리고 민족의 지도자 의암 류인석 선생은 항일 의병투쟁의 선구적 지도자인 행적과 업적이 새겨져 있다.
의암 기념관에는 '민족의 지도자 의암 류인석 선생의 흉상'이 있다. 그리고 민족의 지도자 의암 류인석 선생은 항일 의병투쟁의 선구적 지도자인 행적과 업적이 새겨져 있다.

심문관: “총지휘자는 누구인가?” 안중근: “조선 8도 총독 김두성(金斗星)이며 강원도 사람이다.” 19091026930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바로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이 심문관에게 진술한 내용이다.

김두성이 누구인지 밝혀내기 위하여 일제는 혈안이 되었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해방 이후 조동걸 교수, 이상근 교수 등 사학자들이 김두성 연구를 시작해 김두성은 유인석이다라고 단정했다.

유인석 장군은 늙고 병든 몸으로 19085월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유인석 장군을 따르는 자 60여 명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유인석 장군은 19088월 최재형과 이범윤을 만나 군자금을 전달했다. 일제를 물리치기 위한 방책을 마련하다가 조선 13도 모든 국민이 일심동체가 된다면 침략자 일제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인석 장군은 국민에게 호소하면서 의병조직과 운영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의병 규칙 35조를 제정하여 190810월에 반포했다. 수많은 충의지사(忠義之士)를 단결시켰고, 충의지사들은 의암을 13도의군도 총재로 추대하였다. 1910515일 연해주 지신허, 재구에 장단(將壇)을 쌓고, ‘復國宗社扶道保民여덟 글자로 된 큰 기를 걸고 그 아래서 장엄한 식을 거행하여 13도의군도 총재로 등단하였다.

지평면 사무소 앞에'지평 의병 발상지' 표지석이 있다. 지평면은 옛 지평현의 중심이며 예로부터 국왕이 선호하는 사냥터이자 강무장으로 이름이 알려진 곳이다. 높은 학식과 인품을 겸비한 선비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촉발된 최초의 항일의병인 을미의병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지평면 사무소 앞에'지평 의병 발상지' 표지석이 있다. 지평면은 옛 지평현의 중심이며 예로부터 국왕이 선호하는 사냥터이자 강무장으로 이름이 알려진 곳이다. 높은 학식과 인품을 겸비한 선비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촉발된 최초의 항일의병인 을미의병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유인석 선생은 전국적으로 7,905명의 제자를 거느렸던 화서 이항로의 수제자로서 화서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종장(宗匠)이었다. 유사시에 본인의 제자는 물론 화서의 제자를 동원할 수 있는 전국적인 인맥을 가지고 있는 학자였다.

유인석 장군의 의병 활동은 연해주에서 펼친 항일투쟁 이후 대한 광복군의 성립과 독립 무장투쟁의 발판이 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15년 유인석 선생은 독립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낯선 중국 봉천성(奉天省)(현 랴오닝성 遼寧省) 관전현 방취구 이국땅에서 순국하여 평정산에 안장했다. 그의 나이 74세였다. 1935년 음력 314일 고향인 춘천시 남면 가정리 현 묘역으로 옮겼고, 20003월 묘역이 강원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복장(현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암 기념관 [毅菴記念館]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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