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능성시길 기자단과 함께한 여주 역사탐방기

지난 2월 말일 궁능성시길(대표 조정화) 협찬을 받아 궁능성시길 30명의 기자들과 함께 사당동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여주 투어를 했다.

이날 투어는 봄의 향기가 가득한 가운데 조정화 대표의 역사탐방 설명을 들으며 여주 영릉과 영릉(驪州 英陵寧陵)을 탐방과 여주한글시장에서 점심을 먹고 시장을 돌아봤다. 그리고 신륵사로 이동해 사찰 탐방을 했다.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왕 세종1397~1450과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능이고, 영릉(寧陵)은 조선 17대 왕 효종1619~1659과 인선왕후 장씨1618~1674의 능이다. 여주 영릉과 영릉은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기도 여주시 영릉로 269-10 (능서면)에 위치해 있으며 편안히 탐방할 수 있었다.

세종대왕 영릉을 먼저 탐방 했다. 매표소를 지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들어가다 보면 두 갈레 길이 나타난다. 왼쪽길인 세종릉으로 향한다. 입구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우뚝 서있다.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동상 앞에서 일행은 단체사진을 찍고 주변의 전시된 측우기, 수표, 혼상, 양부일구 등 세종 당시의 발명품들을 둘러봤다. 특히 자격루에 관심을 두자며 조 대표는 해가 안 뜨는 날 물시계의 중요성에 대한 설명을 했다.

우리나라 오백년 역사에 가장 훌륭한 세종은 1418년 왕위에 올라 32년간1418~1450 재위하면서 정치·경제·문화·과학·군사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조선시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왕이다.

영릉재실을 지나고 구 재실 작은책방을 지나니 꽁꽁 얼어붙은 연지가 나타났다. 이어 금천교를 건너 홍살문에 다다랐다. 이곳에는 향과 축문을 들고 걸어가는 향로(왼쪽)와 임금님이 걸어가는 어로(오른쪽)가 있고 오른쪽에는 배위(판위)가 있다.

▲정조대왕릉 홀살문 앞에서 능 전경을 담았다.
▲정조대왕릉 홀살문 앞에서 능 전경을 담았다.

홍살문을 지나니 저 멀리 정자각 뒤로 영릉이 보이고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능지기들이 머물던 수복방, 왼쪽에 음식을 준비하던 수라간이 있다. 영릉 비각에 다다라서는 합장릉의 형태로 조성됨을 실감케 된다. 영릉 비문에는 세종 장헌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과 소현왕후 심씨에 대한 설명이 있다.

영릉은 세종 28(1446)에 소헌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의 능인 헌릉, 지금의 서울 서초구 서쪽 언덕 순조의 능인 인릉 자리에 조성되었다. 4년 뒤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합장릉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그 후 풍수지리상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예종 1(1469)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왕릉 가는 길을 따라 능에 오르니 예전과는 달리 봉분 전면에 들어갈 수 없어 아쉽다. 봉분 주변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무덤을 옮길 때 전에 있던 석물인 상석, 명등석, 망주석, 신도비들은 그 자리에 묻었으며, 훈민문·세종대왕동상·세종전 등은 1977년 영릉정화사업 때 세운 것이다.

▲세종왕릉에서 내려와 왕의 숲길을 따라 20여 분간 효종과 인선왕후의 무덤이 있는 영릉으로 갔다.
▲세종왕릉에서 내려와 왕의 숲길을 따라 20여 분간 효종과 인선왕후의 무덤이 있는 영릉으로 갔다.

세종왕릉에서 내려와 왕의 숲길을 따라 20여 분간 산책을 해서 효종과 인선왕후의 무덤이 있는 영릉으로 갔다. 이곳도 세종릉과 마찬가지로 홍살문, 금천교, 연지가 있다. 그런데 금천교가 홍살문 뒤쪽에 있고 금천이 제향공간을 지나가고 있어 의문이다.

영릉 비문에는 효종 선문장무신성현인 대왕이 훙(승하)하여 같은 해 1029(병진일)에 양주 건원릉(테조의 능) 근처 오른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계축년(1673) 107(계묘일)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쓰여 있다. 이듬해에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지금의 자리에 무덤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동원상하릉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이날 효종릉은 가까이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조 대표의 세세한 설명으로 대체한다. 무덤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고, 돌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돌에 문자를 새겼다. 무덤 앞에는 상석·문인석·망주석 등의 석물이 있으며,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다.

효종은 1649년 왕위에 올라 10년간 1649~1659 재위하면서 군제를 개편하여 군사 훈련 강화에 힘썼고, 청나라를 치려는 북벌 계획을 세웠다. 또한 대동법을 확대하고 화폐를 보급함으로써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조선시대 왕릉 재실 중 형태가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효종대왕릉 재실에서 단체촬영을 했다.
▲조선시대 왕릉 재실 중 형태가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효종대왕릉 재실에서 단체촬영을 했다.
▲아름드리 나무와 천연기념물 제459호로 지정된 300년이 된 회양목을 함께 담아봤다.
▲아름드리 나무와 천연기념물 제459호로 지정된 300년이 된 회양목을 함께 담아봤다.

영릉 마지막 탐방은 보물로 지정된 재실이다. 조선시대 왕릉 재실 중 형태가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눈길을 끌고 천연기념물 제459호로 지정된 300년이 된 회양목이 있다.

재실에서 나오니 주차장에 관광버스가 친절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12시가 되어 여주한글시장으로 이동해 점심을 먹고 시장투어를 했다. 시장 투어에서는 조대표가 반별 이벤트를 제시해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했다.

여주한글시장은 여주의 대표적 중심상권으로서 세종대왕의 영릉과 함께 세자 세종의 얼이 깊이 새겨진 시장이다. 5, 10 단위의 5일장이 열리며, 문화관광형시장육성사업을 통하여 늘 새로운 변화와 활성화를 모색하고 있는 여주의 자랑스로운 시장이다.

2017년 노브랜드 상생스토어를 유치하여 매장 내 여주특산품매장도 함께 운영하며, 다함께 사는 시장, 새로운 상생의 길을 열어가고 있는 곳이다.

시장 투어를 마치고 걸어서 신륵사로 갔다. 신륵사는 경기도 여주시 봉미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긴 세월 남한강과 함께 어우러진 사찰로고려시대 말기인 1376(우왕 2) 당시 왕사였던 나옹선사 혜근이 잠시 머물던 중 입적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며 고려 우왕 2(1376)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남한강변의 자연 경관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신륵사 탐방은 경기도문화관광해설 신륵사 담당자가 맡아 진행했다. 해설자는 봉미산신륵사 현판과 사찰명부터 시작해 사찰을 돌며 중요문화재인 7개의 보물을 찾아 자세하게 설명했다.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되면서 왕실에서 신륵사를 왕실의 원찰로 삼았고 1472년에 대규모 중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중창(重創)은 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짓는 것으로당시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라고도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 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워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해설자가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앞에서 기자들에게 다층전탑에 관한 해설을 하고 있다.
▲해설자가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앞에서 기자들에게 다층전탑에 관한 해설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 때부터 벽 절[  ]이라 불려지기도 하기였는데, 이는 경내의 동대위에 있는 다층전탑을 벽돌로 쌓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절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 보물 제225호인 다층석탑,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 보물 제231호인 석등이 있으며, 유형문화재로는 극낙보전과 그이외의 부속 건물로 구룡루·명부전·시왕전·산신당·육각정 등이 있다.

▲경기문화관광해설자가 궁능성시길기자들과 함께 나옹스님의 청산가를 읊으며 신륵사 투어를 마무리 했다.
▲경기문화관광해설자가 궁능성시길기자들과 함께 나옹스님의 청산가를 읊으며 신륵사 투어를 마무리 했다.

7개의 보물 모두를 돌아보며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해준 해설자는 마지막으로 궁능성시길 기자들과 함께 나옹스님의 청산가를 읊으며 신륵사 투어를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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