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산 역사.문화 답사, 창성사(지)를 찾아서(2)

'광교산 역사.문화 답사, 창성사(지)를 찾아서(2) -현. 창성사지 지정 장소 예비조사

② 상광교동 산41번지는 현재 창성사지로 지정된 곳이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지정되었을까?

상광교동 산41번지가 언론에 알려진 것은 1997년 5월 24일자 늘푸른수원이다.

'일제강점기 소화 12년 것으로 보이는 조선총독부 보물 제22호라는 표석이 남아있다. 창성사 자리를 우리 시민들이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루봉 중턱 약수터 자리 (① 상광교동 산16번지)를 창성사 절터로 알고 있다.

▲ 창성사지

그러나 이종학, 리제재씨 등 우리지역의 향토사학자들과 광교주민들의 고증에 의하면 상광교동 41번지가 원래 창성사지임이 확실하다.

'광교주민들의 고증과 이종학, 리제재씨 등 향토사학자들의 답사로 창성사지임이 확인됐고 현장의 조선총독부 표석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수원시 문화재 자료집에 향토유적 제4호 창성사지의 지정일자는 '1986년'이며 주소는 이곳 상광교동 산41번지로 돼있다.

절터약수터에 표지판을 세우고 10여 년 넘게 지내왔으며 표지판을 훼손했다고 벌금도 물리고 절터약수터를 창성사약수터, 창성사터약수터라 표기했던 시기가 1997년도 까지다.

이런 상반된 사실로 미뤄 1986년 창성사지를 향토유적으로 지정할 때 ① 과 ② 중에 어디였는지는 정확히 해 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 창성사지 지정 장소에서 예비조사

어찌됐든 현. 창성사지는 고도 344미터로 광교산 중턱에 있다. 커다란 돌로 단을 높이 올려 전망이 좋고, 언덕이 뒷바람을 막아 포근하다. 우물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3번 버스 종점 등산로 안내소에서 폭포식당앞 개울을 지나 10여 분 동안은 비교적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양갈래 길에서 바위가 많은 좌측길로 들어서면 목적지 방향이다. 여기서부터는 약간 오르막이다.


가다보면 길가에 세 곳의 돌무더기가 있다. 한 눈에 봐도 오래 된 형태다. 다른 절터를 찾아가는 길에는 이처럼 오랜시간에 걸쳐 쌓아놓은 돌무더기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뭔가 느낌이 다른 사찰임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10여 분 더 가면 오르막길은 막을 내린다. 그 자리에서 앞을 보면 기단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진각국사비가 서 있던 곳이 보인다. 먼저 진각국사비가 서 있었던 곳에 가 보면 1930년대에 만들어 세웠다는 조선총독부 표석이 있다.

▲ 조선총독부 보물 제22호라는 표석이 있다.

눈여겨 봐 둘 필요가 있다. 보물 지정 표석의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단지 모조품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피할 수 없다. (네이버 검색 진각국사비 조선총독부 표석)

진각국사비가 서 있던 장소는 작은 언덕이다. 방향은 서향으로 탑비가 서 있던 곳 아래는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평지가 있다.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표석의 모조품 논쟁과 별개로) 진각국사비가 서 있었던 곳은 이 곳이 맞다고 한다. 하지만 애초에 이 자리에 세웠는지는 조사가 더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탑비가 서 있던 곳을 나와 사지로 가면 기단석(석축)의 높이에 놀라게 된다. 앞에 서면 성곽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그 만큼 공을 들인 사찰이라 느껴진다.

현장은 문화재발굴을 진행하고 있어 파란색 보호비닐로 덮어 놓았다. 때문에 옛 우물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움이 있지만 가장자리에 있는 또 다른 우물은 볼 수 있다. 석탑 부재를 우물 덮개로 사용하고 있어 무지의 어리석음이 보인다.

사지 입구와 건물지 뒤쪽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보호해야 할 가치가 큰 나무들이다. 절터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이런저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늑하고 평온하다.

드디어 광교산의 주인 창성사(지)를 찾은걸까?

 

 

"탑비의 명칭에 '창성사(彰聖寺)' 라는 사찰명이 들어가 있고 '이 비는 창성사(彰聖社) 경내에 세웠다'는 내용이 비문에 나와 있다" (寺와 社가 다른 점은 조사중)

진각국사비가 서 있었던 장소가 확인 됐고 상기 비문을 근거로 추정한다면 근처에 있는 사지가 창성사(지)일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학계에선 창성사의 암자로 보는 의견이 많다.

2013년부터 암자로 추정된다는 논문이 발표되고 창성사지 발굴 학술대회에서도 암자 가능성이 거론됐다. 최근 13번 버스 종점 사지(창성사 옛 법성사 부근) 발굴 조사 후엔 그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① 상광교동 산16번지 절터약수터를 답사하고, 오늘 ② 상광교동 산41번지 창성사지로 지정된 곳을 예비 답사했다. 본 답사가 이뤄지면 창성사를 찾아서 프로그램은 ③ 상광교동 50종 부근 (창성사 부근 사지)만을 남겨 놓게 된다.

단지, 1997년 무렵 10여 년간 창성사지로 불렸던 절터약수터는 창성사지가 아니며 상광교동 산41번지가 창성사지가 확실하다고 말한 향토사학자가 '사운 이종학' 선생이라면... 왜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되는 조선총독부 표석을 일제잔재청산에 앞장섰던 그가 알고도 그냥 지나쳤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 김준용장군전승 비와 설명문 비교검토

이번 예비답사는 경기도기념물 제38호 김준룡장군전승지및비까지 이어졌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화성축성의 총리대신이었던 채제공이 석재를 구하기 위해 광교산에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김준룡장군 전승 사실을 새기라고 했다' 김준룡장군비 설명문이다.

'채제공이 새기라고 해서 새겼다'면 1792년~1795년으로 추정됩니다.
그 보다 100여 년 전인 1685年(肅宗11年)에 세워진 김준룡 神道碑『贈兵曹參判行北都護府使金公神道碑銘』'근왕'이라는 단어가 다릅니다.

▲ 김준용장군 전승비 검토

예비답사 참여자.

김낭자. 구효종. 남해복. 안숙. 염재준. 서정일 등 6명

별개로...

시니어, 실버는 노년층을 말한다. 백세 시대, 그들에게 걷기와 탐사는 참 중요한 활동으로 보인다. 체력을 강화시키고 치매를 예방하는데 비용은 적게 들면서 효과는 크다.

더구나 그들의 지식과 지혜가 탐사활동을 통해 발견되는 다양한 결과들과 결합돼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거름이 되기도 한다.

▲ 광교산 11길 등산로 입구에서 기자단 일행을 만나다.

최근 광교IT기자단과 광교노인복지관 이용자들은 광교산으로 향했다. 살아있는 자연 역사 박물관 광교산에서 걸으며 건강을 챙기고 탐사하며 머리를 회전해 치매를 예방하는 일석이조의 활동을 벌였다. 덤으로 사회 유익한 조언까지...

광교산은 시니어. 실버 즉 노년층에게 정말 좋은 건강 치유 센터라 생각된다.

[출처] 광교산 김준룡장군비의 '근왕' 신도비와 글자 달라|작성자 서정일

▲ 창성사지 진각국사비, 김준룡장군비 예비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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