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세계유산 백제역사 유적지 공주, 부여 탐방

싱그러운 녹음이 절정인 5월 23일(수), 광교노인복지관 역사탐방반 수강생 7명은 김희태 강사의 안내로 유네스코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인 공주, 부여를 탐방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2015년 7월 8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1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한국에서는 12번째 세계유산이다.

▲ 백제역사 유적지구

한국, 중국, 일본의 고대 왕국들 사이의 상호교류를 통해 백제가 이룩한 건축 기술 발전과 불교 확산과 수도 입지 선정, 불교 사찰, 성곽과 건축물의 하부구조, 고분과 석탑을 통해 백제의 역사, 내세관과 종교, 건축기술, 예술미를 보여주는 유산이자 백제의 역사와 문화의 특출한 증거가 세계유산 등재 기준이 되었다.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660년까지 약 700여 년간 존속한 삼국시대의 한 국가다. 백제후기(478년~660년)의 문화유산으로는 공주의 공산성, 송산리고분군, 부여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나성, 익산 왕궁리유적, 미륵사지로 구성돼 있다.

대한민국 중서부에 위치한 공주, 부여, 익산의 8개 유산은 과거 백제가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중국, 백제, 일본을 이어주는 동아시아 교류의 중심이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백제는 불교를 확산시켰고, 예술, 건축, 기술 등을 발전시켰다.

이날 역사탐방반은 공주에서 취리산 회맹지, 공산성, 송산리고분 및 무령왕능, 부여에서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및 석불좌상, 관북리유적 및 부소산성 등을 탐방했다.

역사탐방반 8명은 세계유산을 품은 도시 공주에서 백제숨결을 찾아봤다. 

11시경 먼저 치미마을을 지나 취리산 회맹지로 갔다. 백제 멸망 후 다시 부활을 꿈꾸었던 취리산 회맹지 비문엔 '제라회맹단지'라고 쓰여있다.

▲ 취리산 회맹지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제라회맹단지 비석앞에서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했으며 사비성의 함락에 이어 웅진성으로 도망했던 의자왕이 결국 항복을 하면서 자주국가로서의 백제의 사직은 종언을 구하고 말았다.

665년 당나라 웅진도독부의 수장인 부여융과 신라의 문무왕,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모여서 웅진에 위치한 취리산에서 회맹의 의식을 가졌다. 하지만 당나라의 강요나 다름이 없었던 친하게 지내보자는 취지의 취리산 회맹은 이후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 회맹의 주인공이었던 유인궤는 곧 당나라로 돌아가게 되고, 부여융 역시 당나라로 돌아가게 된다. 문무왕은 취리산 회맹을 통해 당나라를 몰아내는 나당전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는데 이러한 취리산 회맹이 있었던 곳이 공주에 있다,

취리산의 위치에 대해 인근의 연미산이라는 주장과 현재의 위치인 치미산 중에 하나로 보고 있는데 현재까지는 공주생명과학고등학교 뒤에 있는 작은 산을 취리산(치미산)으로 보고 있다.

11시 30분에 백제역사 유적지구인 공산성으로 이동했다.

▲ 백제역사 유적지구 공산성 성벽

공산성은 사적 제12호로 금서루 입구에는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군이 있다.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송덕비와 제민천교영세비 등 47기가 있다.

매표소 입구에는 박노식, 문희, 허장강, 박성호 등 당대의 인기배우들이 출연한 ‘공산성의 혈투’ 촬영장소란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이 영화는 백제가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공주로 도읍을 옮기던 무렵을 배경으로 한 이강천 감독의 사극영화다.

공산성은 백제의 두 번째 도읍지로 고구려의 남진에 의해 백제 개로왕이 피살되자 그의 아들 문주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웅진백제시기(475년~538년)를 대표하는 왕성으로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이다.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인해 문주왕 원년(475년)에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공산성은 문주왕을 비롯해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거쳐 성왕16년(538년)에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64년 간 백제의 왕성이었다.

▲ 백제역사 유적지구 쌍수정

공산성은 백제 시대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시대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이 성은 금강에 접한 해발 110m의 산에 능선과 계곡을 둘려쌓은 포고형 산성으로 축조되었는데,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다가 조선시대 인조, 선조 이후에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현재는 동쪽의 735m를 제외하고 모두 석성이다.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웅진시대 초기의 왕궁터인 추정왕궁지,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일시 파천했을 때 5박6일간 머물렀던 쌍수정(문화재자료 제49호), 쌍수정 사적비(도지정유형문화재 제35호), 백제 동성왕 22년(500년) 왕궁의 동쪽에 건축한 건물로서 신하들의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던 임류각 등이 있다. 또 쌍수정의 일화와 인절미의 고향이 공주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성곽 길을 따라 걷다보면 금강을 낀 공주시를 한눈에 볼 수가 있어 백제의 숨결을 느끼며 트래킹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1시경 공주 '개성집'에서 황태찜 정식을 먹은 후 50분 정도 걸려 부여로 이동해 백제사의 열쇠 송산리 고분군에 들렸다.

▲ 송산리고분군 모형 전시관

송산리고분군은 사적 제13호로 웅진시기(475년~538년)의 백제왕릉군 7기의 고분이 정비되어 있다. 1~5호분은 굴 모양의 돌로 쌓은 무덤(전축분)이다. 특히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발굴되었고 축조시기(525년)가 확인되며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가와의 교류를 알 수 있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1971년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이는 피장자의 신분을 알 수 있는 한국 고대의 유일한 왕릉으로 1,500년 전의 화려하고 세련된 미의식, 수준 높은 공예기술을 통해 찬란한 백제문화를 엿볼 수 있다.

국보 제163호로 지정된 묘지석, 고려시대 이전의 고분 중 피장자가 확인된 몇 안 되는 고분으로 백제의 왕으로서는 유일하게 밝혀진 고분이다. 이는 무령왕릉의 입구에서 확인된 묘지석이 큰 역할을 했는데, 이 때문에 묘지석 자체가 국보로 지정되기도 했다.

▲ 송산리고분군 무렬왕릉

웅진백제역사관은 컨텐츠와 IT시스템을 활용한 교육, 홍보, 체험이 가능하여 쉽고 흥미롭게 백제문화를 접할 수 있으며 영상관과 전시관을 갖추고 있다. 송산리고분군모형전시관에는 무령왕릉과 5.6호분을 실물 크기로 재현, 백제왕릉의 발굴과정을 살펴보고 체험으로 백제문화를 배울 수 있다.

3시 20분경 정림사지로 이동했다.

정림사지는 사적 제301호로 사비도성의 중앙에 위치하였던 절터다. 백제 사비도읍기(538년-660년)에 건립된 사찰로서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 내부의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다. 남북 일직선상에 중문, 탑, 금당, 강당을 배치한 백제가람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고려시대(1028년)에 제작된 기와 명문을 통하여 정림사지라 불리고 있다. 백제문화권 정비사업의 핵심 사업으로 발굴조사를 거쳐 가람터를 정비한 것이다.

▲ 정림사지 오층석탑

도심에 세워진 절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사례 중 하나이다. 목탑의 한계를 극복한 높이 8.3m의 석탑이 남아 있으며 조사결과 금당지, 강당지, 송방지 등이 확인되어 불(佛).법(法).승(僧)의 불교의 3보를 모두 구비한 백제 고유의 사찰 건축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의 사찰은 탑과 금당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된 모습(1탑 1금당)이 특징인데 정림사지 역시 이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전통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진다.

국보 제9호인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부여의 백제역사지구에 포함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백제시대 석탑의 원형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목탑의 구조적 특징과 완벽한 균형미를 보여준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 시기의 석탑으로는 미륵사지와 함께 유일하게 남아있는 석탑이면서 동시에 석탑의 기단부에는 백제 멸망때 소정방이 탑에 새겨 놓은 ‘대당평백제국비명’ 이 새겨져 있다.

▲ 정림사지 석불좌상

당시 백제의 치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아픈 역사를 상징하는 역사의 한 부분을 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백제의 화려했던 문화와 망국의 역사를 보는듯했다.

정림사지 석불좌상은 정림사지의 강당지 한복판에 있는 고려시대 불상으로, 보물 제108호이다. 높이 562㎝의 거불(巨佛)로 오른팔과 왼쪽 무릎이 떨어져나갔고 몸체의 마멸이 심한 편이다. 또한 머리부분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전체적인 양식고찰이 어려우며, 왼손의 윤곽으로 보아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비로자나불로 추정된다.

4시 30분경 구드래나루터로 이동해 백마강에서 유람선 타고 낙화암 고란사로 갔다.

▲ 백마강

유람선에는 두 가지 종류의 배가 있는데 인기 있는 황포돛배와 유람선이 있다. 황포돛배를 타려면 인원이 30명이 있어야 탈 수 있기 때문에 유람선을 탔다. 유람선이 잔잔한 백마강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자 배에서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백제시대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사비성이 함락 당하자 궁에 있던 수많은 여인들이 낙화암에서 뛰어 내렸다. 당시 이곳에서 투신했다고 알려진 삼천궁녀이야기는 망국의 군주인 의자왕을 모욕주기 위함이다. 삼천궁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고란사 경내를 둘러봤다. 최근에는 고란사 약수가 TV에 소개되면서 고란사의 사찰보다 고란사 뒤편의 고란약수가 더 유명해졌다.

부소산성에 남겨진 백제의 이야기로 낙화암과 고란사, 조룡대와 백마강은 잘 알려져 있다. 조룡대는 낙화암아래 바로 앞쪽의 작은 섬 모양 바위이다. 삼국유사에서 사비하(백마강)의 바위에 소정방이 어룡을 낚았던 장소라고 하며, 이를 용암이라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산의 정상부분의 절벽에 해당되는 낙화암 아래로 백마강이 유유히 흐르는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 백제역사 유적지구

관북리유적은 사적 제428호로 대형건물지, 지하저장시설, 연못, 도로 유구 등 왕궁관련 시설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대형건물지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커서 왕궁 내에서 가장 중요한 정전건물이었을 것으로 보며, 거의 동일한 구조와 규모의 건물지가 사비 후기 왕궁인 익산의 왕궁리유적에서도 확인되었다.

사비시기 백제는 북쪽으로부터 서쪽까지 반달처럼 금강이 휘감아 흐르는 평야지대에 자리 잡았다. 새 왕궁은 사비(부여)의 북쪽 부소산 기슭에 세워졌으며, 현재의 관북리 유적을 왕궁으로 보고 있다, 왕궁 뒤쪽에 위치한 부소산은 평소 왕이 즐겨 찾는 후원이었고, 산 정상과 능선을 따라 판축기볍으로 쌓은 부소산성은 비상시에 피난처로 사용되었다. 부소산성은 사적 제5호이다.

▲ 백제역사 유적지구

김희태 강사는 “오늘 공주에서 공산성, 송산리고분군 및 무령왕릉을 갔었고 부여에서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관북리유적 및 부소산성을 들렸으니 백제역사유적지구 총 8개 중 4군데를 탐방했습니다. 다음에 익산 쪽으로 갈 때 부여에서 들리지 못한 두 곳(능산리고분군, 나성)을 보고 익산으로 가면 되겠습니다.”고 했다.

광교 더샾에 사는 송재정 어르신은 “복지관에서 강의를 듣다가 현장에 와 직접 보며 들으니 이해가 잘 되고 재미있습니다.”고 말했다.

6시경 백제의 집에서 연잎밥 정식으로 맛있게 저녁식사를 한 뒤 오랜 기간 전해져온 백제의 흔적을 가슴에 담고 복지관으로 돌아와 해산했다.

함께 역사탐방길에 올랐던 여덟분(김희태, 김만호, 김영기, 민호순, 송재정, 임희선, 안숙)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도 하고 간식도 나누어 먹으며 즐겁고 보람된 자리가 되었습니다. 특히 승용차를 운전해주신 김희태 강사님과 민호순님 수고 많이 하셨고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슴을 감사드립니다.

아래 링크를 누르면 램블러로 이동됩니다.(김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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