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웅진백제의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공주여행

「편집자주」: '김희태의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게재한다.

김희태 강사는 지난해 7월부터 광교노인복지관 역사탐방반에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강좌를 맡아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암기가 아닌 이해에 중점에 두고 강의 진행, 문화재를 바라보는 법을 이해하고, 사진과 영상 자료를 통해 학습 진행, 역사탐방 때는 그 동안 배운 학습을 이해하는 장으로 활용, 강의를 통해 우리 주변의 문화유산 혹은 이야기를 소재로 스토리텔링을 찾아보고 있다.

김희태 강사 약력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졸업

성공회 대학교 시민사회복지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수료

-현)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현) 평택자치신문 전문필진

-현) 논객닷컴 칼럼리스트

김희태 강사 저서, 연재

-화성 저널, 이야기가 있는 화성 연재

-뉴스타워,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연재

-평택자치신문, 김희태의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연재

-논객닷컴, 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연재

 

공주는 백제의 두 번째 도읍이면서 동시에 63년간 5명의 왕이 거쳐 갔던 곳으로 인근의 부여와 함께 백제사에 있어 중요한 곳이다. 흔히 백제를 부를 때 한강유역에 자리했던 시기를 한성백제라 부르고, 공주에 도읍을 했을 때 웅진백제, 마지막으로 부여에 도읍을 했던 사비백제 시기로 나누는데 이 중 오늘은 공주에 도읍을 했던 웅진백제의 이야기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이번 여행을 통해 한성백제 시기의 공주는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수촌리 고분군을 통해 볼 수 있으며, 본격적으로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를 했던 시기에서 나타나는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의 길로 접어들 때의 흔적으로 공산성 성안마을과 취리산 회맹지를 통해 살펴볼 수가 있는데, 백제의 초기와 웅진백제, 그리고 멸망의 순간까지 모든 이야기가 함께 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백제 지방 통치체제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 수촌리 고분군

아직 백제가 한성인 하남 위례성에 있을 무렵, 공주에서도 지배력을 가진 토착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세력은 가문을 이루어 세습하고 있다는 것을 수촌리 고분군을 통해 알 수가 있다. 수촌리 고분군에서는 금동관모를 포함하여 금동제 유물, 당시로서는 사치품인 중국제 도자기 등이 발견이 되었는데, 특히 금동관모를 주목하여 당시 백제가 충청도와 전라도 등에 토착세력에게 금동관모와 금동제 유물, 사치품 등을 하사하는 관계로 보고 있다.

▲ 수촌리 고분군, 출토되는 유물을 통해 백제의 중앙과 지방 통치를 이해할 수 있다.

즉 백제로서 직접 통치보다 기존 토착세력의 지배자에서 그 힘을 위임하고, 그들의 충성을 받는 형태로 백제의 지방 통치체제가 이어졌을 가능성을 수촌리 고분군을 통해 알 수가 있는 셈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수촌리 고분군의 2지점에서 보이는 다섯 기의 고분이 시대를 달리하며 발전해왔는데 초기 묘제 양식인 목곽묘가 2기, 횡구식 석실분이 1기, 마지막으로 가장 후기의 묘제인 횡혈식 석실분이 2기가 확인이 되면서 수촌리 고분군은 당시 공주지역의 토착세력, 그 가문의 묘역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곰사당을 통해 살펴보는 고마나루의 전설

공주는 곰과 관련한 이정표나 조형물 등이 많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으로 공주시의 마스코트 역시 고마곰으로 불리고 있다. 고마는 곰으로 변형이 되고, 고마나루에서 곰나루로 바뀐 것으로 보이는데, 공통점은 모두 곰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보면 웅진성을 곰나루성이라 적고 있어, 곰나루와 웅진은 같은 의미라는 것을 볼 수 있다.

▲ 고마나루에 세워진 곰사당, 고마는 곰으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고마나루의 전설은 곰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과거 이곳에 살던 암곰이 길을 잃은 나무꾼을 데리고 같이 살았는데, 나무꾼과 암곰의 사이에서 두 자식이 생겼다. 하지만 나무꾼은 원하지 않은 이 생활을 이어갈 마음이 없었고, 마침내 이곳을 탈출하여 금강을 건널 무렵,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암곰이 두 자식을 데리고 와서 돌아오라고 애원했지만, 끝내 외면하고 가버리자 암곰이 두 자식을 데리고 금강에 뛰어들었다는 요지의 내용이다. 때문에 금강에 빠져 죽은 암곰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곰나루터 인근에 곰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곰사당이 남아있으며 사당 내부에는 특이하게 돌곰이 자리하고 있다.

송산리 고분군과 정지산 유적

송산리 고분군은 웅진백제 시기의 왕과 왕족들의 묘역으로,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사실임이 입증이 되었다. 송산리 고분군은 크게 7기의 고분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가장 높은 곳에 1호분에서 4호분이 정렬이 되어 있으며, 묘제 양식은 당시 성행하던 횡혈식 석실분이다. 그 아래로 무령왕릉인 송산리 7호분과, 5호분, 6호분이 차례로 자리하고 있으며, 5호분까지는 횡혈식 석실분이지만 6호분과 7호분은 벽돌무덤인 전축분으로 확인되고 있다.

▲ 송산리 고분군의 전경

송산리 6호분에 대한 조사를 통해 벽돌의 명문에서 양나라의 묘제 양식을 차용했음을 알 수 있으며, 사신도의 벽화가 확인이 되고 있어 눈여겨볼만한 고분이다. 6호분과 동일한 전축분인 7호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무령왕릉으로, 무령왕릉의 발견은 우리 고고학에 있어 큰 발견이지만 동시에 졸속 발굴로 인한 최악의 발굴로 기록되고 있다. 무령왕릉에서 쏟아진 유물은 당시 백제의 문화와 예술, 시대상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상당수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무령왕릉, 백제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피장자가 확인된 능이다.
▲ 무령왕비의 빈전이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지산 유적

현재 송산리 고분군의 모든 고분은 영구 폐쇄가 되어 볼 수가 없기 때문에 현재는 송산리 고분군 아래 모형관에서 고분의 특징과 5호분과 6호분, 무령왕릉의 내부를 모형관으로 볼 수 있으니 함께 보기를 권한다. 아울러 송산리 고분군에서 정지산 유적으로 향하는 길이 있는데, 출토되는 유물을 통해 정지산 유적이 국가차원의 제사시설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내부의 시설이 이제까지 나온 적이 없는 독특한 형태로, 무령왕비의 묘지석을 통해 빈전이 설치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웅진백제의 도읍인 공산성에 남겨진 이야기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인해 결국 백제는 첫 수도인 한성을 포기하게 되고, 문주왕은 지금의 웅진으로 천도를 단행하게 된다. 당시 백제가 쌓았던 공산성은 지금의 형태처럼 석성이 아니라 백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판축기법을 한 토성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공산성의 일부 구간에서 옛 토성의 흔적을 확인해볼 수 있다. 현재 공산성 내에서 백제와 관련한 곳은 크게 왕궁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추정 왕궁지와 동성왕 시기 연회를 베풀기 위해 만들었다는 임류각지, 최근 발굴조사 등을 통해 ‘정관19년’ 명문이 새겨진 칠갑옷이 발견된 성안마을 등이 있다.

▲ 웅진성으로 불렸던 공산성, 본래 백제 때는 토성으로 축성했는데, 지금도 일부 흔적이 남아 있다.

이후 백제가 도읍을 사비로 옮겼으나,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백제의 의자왕은 마지막으로 공산성으로 옮기게 되고, 이곳에서 대치를 이어가던 중 항복을 하면서 그렇게 백제의 사직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렇게 보면 웅진백제의 도읍이면서 백제 멸망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산성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까지 백제를 되살리고자 했던 부여융, 취리산 회맹지

백제가 멸망한 이후 옛 백제의 땅에는 백제부흥군이 조직되어 복신과 도침의 활약과 당시 왜에 있던 부여풍을 왕으로 데려오지만, 내분으로 인해 약화되며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의 패배로 백제부흥군은 소멸하게 된다. 이후 당나라는 백제의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그 수반을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임명하는데, 이로 인해 신라와 당나라 간에 갈등이 발생했다. 나당연합군이 성립하기 전 대동강 이남의 영토는 신라에 귀속한다는 약속했는데, 막상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음에도 백제 지역의 땅을 돌려주려고 하지 않았던 셈이다.

▲ 부여융과 문무왕, 유인궤가 모여 회맹의 의식을 가졌던 취리산 회맹지

신라로서는 기껏 백제를 멸망시켰더니 또 다시 백제가 출현한 것과 다름이 없었던 것으로 취리산 회맹은 당나라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신라가 백제를 인정해야 했던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반면 부여융의 입장에서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으로 봐야하는데, 이러한 취리산 회맹이 있었던 곳이 현재 공주에 위치하고 있다. 취리산의 위치에 대해 연미산이라는 주장과 공주생명과학고등학교 뒤에 있는 치미산 중에 하나로 보고 있으며, 현재 치미산의 중턱에는 ‘제라회맹단지’라 새겨진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 취리산 회맹지에서 바라본 공산성과 정지산 유적

보통 공주를 생각하면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을 많이 생각하는데, 이 외에도 한성백제 시기에 당시 공주에 대한 지방통치를 어떻게 했는지를 수촌리 고분군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본격적으로 백제가 천도를 단행했던 웅진백제 시기에 왕성이었던 공산성과 왕과 왕족의 능묘로 사용되었던 송산리 고분군, 그리고 정지산에 위치한 유적을 통해 당시 국가의 제사시설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도읍을 사비로 천도한 뒤에도 공산성은 의자왕이 마지막으로 항전했던 성이자 당나라의 웅진도독부가 설치된 공간이며, 동시에 이곳에서 진행된 취리산 회맹을 통해 마지막까지 백제의 부활을 꿈꾸었던 백제인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소개된 곳들 모두 이전에 비해 이정표나 안내문 등이 잘 정비가 되어 찾아가는 데는 크게 어렵지가 않았지만, 반면 취리산 회맹지의 경우 현장에 세워졌다는 '제라회맹단지' 비석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다. 또한 취리산의 위치가 이곳이 아닌 연미산이라는 주장도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의 고증과 이정표 등은 필요해 보이는 부분이다. 63년간 백제의 도읍으로 사용되었던 공주, 그리고 그곳에 남겨진 웅진백제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와 교육의 장으로 널리 알려져 많은 이들이 찾는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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