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노인복지관 역사문화탐방반, ‘백제역사문화’ 탐방

지난 12일 광교노인복지관 역사문화탐방반 수강생 14명은 김희태 강사와 함께 유네스코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인 전라북도 익산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로 ‘백제역사문화’ 탐방을 다녀왔다.

▲ 유네스코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인 전라북도 익산 미륵사지

‘백제역사문화’ 탐방은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자 지난 5일(수), 강사의 저서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을 바탕으로 수업을 진행한데 이어 현장탐방을 하게 돼 의미가 깊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익산의 왕궁리유적, 미륵사지를 비롯한 공주의 공산성, 송산리고분군, 부여의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나성, 능산리고분군 등 8개 유적이다. 이곳은 한국과 중국 일본 등 고대 동아시아 왕국들 사이의 상호 교류 역사를 잘 보여주고, 백제의 내세간과 종교·건축기술·예술미를 보여주는 특출한 증거라는 평가를 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날 백제역사문화 탐방은 김희태 강사를 따라 익산 미륵사지, 연동리 석불좌상, 서동생가터, 익산 쌍릉, 고도리 석불입상, 제석사지, 왕궁리 유적 순으로 탐방을 하며 둘러봤다.

▲ 동원 구층석탑

미륵사지는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로 사적 제150호이다. 마한의 옛 도읍지로 추정되기도 하는 금마면 용화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한국 최대의 사찰지이다. 백제 제30대 무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로 유명하다.

미륵사지에는 서탑과 당간지주 두 가지의 유물이 있다.

미륵사지 서석탑은 국보 제11호로 동양 최대 석탑이다. 현재 높이 14.24m로 거의 전면이 붕괴되어 동북면 한 귀퉁이의 6층까지만 남아 있다. 본래는 9층으로 추정되고 있다. 1974년 8월 원광대학교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때 동탑지도 발견되었으며, 건물지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구가 복합되어 있다.

2001년 10월부터 해체·보수작업 및 보수정비에 착수하였고, 2017년 12월 석재 조립 공정이 완료되었다. 2018년 6월에는 복원된 석탑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9년 1월 14일, 이탑의 탑신 1층 심주(중앙기둥)를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미륵사지의 창건 년대와 창건주를 기록한 사리봉안 기록판과 금제 사리 항아리 등 유물 500여 점을 발굴했다. 이를 통해 미륵사는 무왕 재위 40년인 서기 639년에 백제인 왕후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발굴을 통해 확인된 가람배치를 보면 동탑과 서탑이 있고 그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각 탑의 북편에 금당의 성격을 가진 건물이 하나씩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들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이 있어 동쪽은 동원, 서쪽은 서원, 중앙은 중원이라는 개념의 삼원식 가람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 미륵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236호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보물 제236호이다. 당간지주란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운 기둥, 즉 지주를 말한다. 높이 395cm이며 통일신라시대 중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 남쪽에 2개의 지주가 동서로 약 90m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의 석불사로 이동했다.

▲ 석불사 대웅전
▲ 석불사 대웅전에 있는 보물 제45호, 석불좌상(석조여래 좌상)

석불사 대웅전에는 보물 제45호로 지정된 백제시대의 석불좌상(석조여래 좌상)과 광배가 있는데 조성 시기는 600년경으로 추정된다. 석불좌상은 삼국시대 환조불로서 국내 최대의 것이고 광배 또한 최대 규모이다.

석불의 머리 바로 뒤 광배 중앙에는 세 겹의 동그라미 속에 16잎의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두광을 표현하고 있다. 광배 높이는 4.48m이고 몸높이는 1.69m로 재료는 화강석이다.

▲ 서동의 탄생지인 서동생가터, 마룡지

익산은 서동설화와 서동요가 살아있는 백제 천년고도지로 서동의 탄생지인 서동생가터로 이동했다.

서동생가터는 서동요를 통해 선화공주의 사랑을 얻고 마침내 백제 30대 무왕으로 등극해서 삼국통일의 웅지를 펼치려 했던 곳으로 마한의 도읍지이자 백제 말기 잠깐 동안 도읍지 역할을 한 별도로 알려져 있다.

서동설화에서는 마를 파는 가난한 소년 서동은 훗날 백제의 제30대 무왕으로 등극하는데 내용은 이렇다.

무왕은 왕이 되기 전 마를 캐서 팔러 다녔는데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 공주가 몹시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선화 공주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어느날 신라로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공짜로 나눠 주며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밤마다 몰래 서동과 만난대요.”라는 노래를 불렀다. 서동의 노래는 금새 신라 수도에 퍼져나갔고, 마침내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화가 난 왕은 선화 공주를 궁에서 쫓아냈고, 서동은 선화 공주 앞에 나타나 “저는 백제의 가난한 백성 서동입니다. 공주님과 결혼하고 싶어서 거짓 노래를 퍼뜨렸습니다. 용서하시고 저와 결혼해 주세요.”라고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 용과 과부였던 서동의 어머니가 정을 통해서 서동이 태어났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는 곳

초록 연이 무성하게 뒤덮고 있는 이곳 마룡지 앞에는 금빛 용 한 마리가 들어서 있고 용과 과부였던 서동의 어머니가 정을 통해서 서동이 태어났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마룡지 앞에서 익산 토성과 오금사가 있는 위치를 멀리나마 볼 수 있었다.

익산 토성은 오금산 봉우리에서 동서로 뻗은 100m 안팎의 산등성이에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1980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는데, 원래 백제 토성으로 축조되었다가 뒤에 돌로 고쳐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성 안에서는 백제 사비시기 토기와 기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백제 때 조성된 이후 고려시대까지 중요한 산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사적 제87호로 지정된 익산 쌍릉인 대왕릉

사적 제87호로 지정된 익산 쌍릉으로 이동했다.

익산 쌍릉은 익산 석왕동에 있는 백제 말기의 굴식돌방무덤이다.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있어 쌍릉이라 부르며, 북쪽의 대왕릉과 180m 떨어진 남쪽의 소왕릉으로 구성돼 있다.

대왕릉은 백제 30대 왕인 무왕의 묘(600-641년), 소왕릉은 선화공주의 묘라는 사실이 단편적인 문헌사료를 통해 오랫동안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중 대왕릉은 최근 발굴 성과로 인해 무왕의 묘라는 사실이 비교적 구체화되었다. 관대 위에서 수습한 상자 속 인골을 분석해 '60대 전후 남성 노인, 키 160∼170.1㎝, 사망 시점 620∼659년'이라는 결과를 공개하면서 대왕릉이 641년에 세상을 떠났고 익산에 큰 관심을 보인 무왕 무덤일 가능성이 커졌다.

소왕릉은 현재 정밀 발굴조사 중에 있어 짧은 시일 안에 익산 쌍릉의 정체성이 정확히 파악될 것으로 보인다.

▲ 보물 제46호, 고도리 석불여래입상

보물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도리 석불여래입상으로 이동했다.

고도리 석불여래입상은 높이 4.24m의 두 석불이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약 200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마주보고 서 있었다. 이 둘은 각각 남자와 여자인데, 평소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해일 자시에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서로 만나 안고 회포를 풀다가 닭이 울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진다.

하나의 돌기둥에 불상의 머리부터 받침돌까지 조각한 것으로, 머리 위에는 높은 관과 네모난 갓을 쓰고 있다, 가늘게 뜬 눈, 작은 코, 가느다란 입술 등 토속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고려 시대에는 신체의 표현이 단순하고 거대한 석상이 많이 조성되었다. 이 불상 역시 그러한 작품 중의 하나로 금마면 남녘 너른 들판에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불상은, 마치 이곳의 수호신 같은 느낌을 준다.

▲ 사적 제 405호, 익산 제석사지

사적 제 405호 익산 제석사지로 이동했다.

제석사지는 백제 시대의 사찰인 제석사가 있던 곳으로 무왕대의 익산 천도설을 밝혀 줄 수 있는 왕궁리 유적과 관련이 있는 절터이다. 제석사는 백제 무왕대에 창건된 사찰로서, 무왕 40년에 벼락으로 불타버렸으나, 탑 아래 넣어 두었던 불사리와 금강반야경을 넣었던 칠함이 보존되어 다시 사찰을 짓고 안치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목탑터·금당터·강당터·회랑 등이 확인되었으며, ‘제석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 기와가 출토됐다, 비록 터만 남았지만, 이 곳은 몇 개 남지 않은 백제 절터의 하나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왕궁리유적, 오층석탑

사적 제408호인 왕궁리유적은 익산 왕궁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들렸다.

왕궁리유적은 1989년부터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에 의하면 백제말기 왕궁으로 조성되어 일정기간 사용한 후 왕궁의 중교 건물을 헐어 내고 그 자리에 사찰이 들어선 복합유적으로 확인됐다.

백제 왕궁으로서는 처음 왕궁의 외곽 담장과 내부 구조가 확인됐다. 왕궁의 남측 절반은 의례와 의식, 정무, 생활을 위한 건물들이 동서방향의 4개 석축으로 공간을 나누어 배치했다, 북측 절반은 왕궁 내 휴식을 위한 공간인 정원과 후원, 백제시대 가장 귀중품인 금과 유리를 생산하던 공방터와 현재까지 확인된 국내 최고의 화장실 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왕궁리유적은 발굴조사 과정에서 약 30만 점 정도의 기와편이 출토되어 다른 유물에 비해 많이 수습되었다. 이러한 기와는 왕궁, 사찰 건물, 담장 등에 사용되었고 막새기와와 함께 시대별로 만드는 흙과 제작방법, 기와 무늬에서 차이가 있어 유적의 연대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라고 한다.

이 왕궁은 뒤에 그 기능이 사찰로 바뀌었는데, 사찰로 기능이 바뀌는 시기에 대해선 백제 말기에서 통일신라 초기라는 이견이 존재한다. 현재 남아있는 오층석탑이 이를 보여준다.

한편 광교노인복지관 역사문화탐방반에서 진행되고 있는 김희태 저자와 함께하는 역사문화탐방은 이달 26일 탐방이 마지막 수업이 된다.

김희태 강사는 현재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평택자치신문 전문필진, 논객닷컴 칼럼니스트로 저서는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외에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과 ‘화성지역학연구 제1집(공저)’ 이 있다.

그는 지난 2016년 7월부터 현재까지 2년간 광교노인복지관에서 역사문화탐방 강의를 해왔다. 그동안 역사문화탐방 수업은 매주 수요일 복지관 2층 가람터에서 진행했다.

현재 20명의 수강생이 강좌를 듣고 한 달에 한번은 현장탐방을 했었다. 수강생들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과 호응도가 높게 평가되고 있는 시점에서 강사의 마지막 수업에 대해 많은 아쉬움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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