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을 좋아하는 현상이 사회 전반을 휩쓰는 현상을 신드롬(syndrome)이라 한다. 지난 3월 대한민국은 ‘이세돌 신드롬’을 앓았다. 이세돌(33) 9단은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와 바둑대결에서 1승 4패로 졌지만 많은 이가 그를 진정한 승자로 기억한다.

대국이 시작한 순간부터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불공정한 경기라는 항의가 여러 번 있었지만 패배 결과를 두고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이세돌이 진 것이지 인류가 진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응원하는 이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3연패로 경기의 승패가 이미 결정되었음에도 마지막 대국까지 승부를 포기하지 않고 1승을 거둔 ‘인간 승부사’의 모습은 국내는 물론 세계에 큰 감동을 주었다.

대국 이후 연령을 초월해 바둑을 배우겠다는 문의가 폭증했고, 초등학교 방과 후 바둑 수업은 지원자가 크게 늘면서 인기를 끌었다. 교육부가 발행하는 교과서에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경기 내용이 수록될 예정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세돌 신드롬’은 시간의 흐름에 소멸되지 않는 인간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는데, 아쉽다."고 마지막 대국 소감을 밝힌 이세돌 9단(33)도 "많은 응원과 격려를 주셔서 깊이 감사하다."며 웃었다. 특히 이세돌은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 어떤것인지를 우리에게 깨우쳐줬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투지 말이다. 대국이 치러진 일주일 동안 '인간계'는 4,000년 숨결이 담긴 바둑과 이세돌의 투혼으로 진한 감동을 받았다.

지난 3월 9일부터 3월 15일까지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는 세기의 바둑대결이자 인류의 축제로 남을 것이다. 3월 15일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마지막 대국에는 국내외 취재진과 바둑 관계자 등 1,000여 명이 몰렸다. 서울에서 열린 축제의 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누구보다 빠르게 타전하려 했다. 마지막 대국에서 이세돌과 알파고는 누구의 승리도 예상하지 못할 만큼 팽팽히 맞섰다. 이세돌은 유일하게 이겼던 4국 때처럼 '선실리 후타개' 작전으로 나섰다. 알파고는 우변과 중앙에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며 맞섰다. 하지만 접전 끝에 근소한 차이로 알파고에 승리를 다시금 내줘 1승4패로 패했다.

분명 바둑 결과만 놓고 보면 '인공지능' 알파고의 승리다. 알파고는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한 차원 높은 바둑을 보여줬다. 고성능 컴퓨터 1,202대가 연결된 알파고는 치밀한 수 읽기, 강한 전투력, '신산(神算)'이라고 불렸던 모든 바둑 고수들이 울고 갈 끝내기 솜씨를 보여줬다. 하지만 인공지능도 인간이 만든 결과물이란 점에서 인간의 승리이기도 하다.

알파고의 등장으로 어렴풋이 그려지던 미래 세계가 훨씬 빨리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미래 세계에서는 인공지능이 다방면에서 활약할 게 분명하다. 또 우리에게 미래에 펼쳐질 사회를 대비해야 한다는 경고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공지능을 보면서 인간적인 가치를 느끼게 했다.

이번 다섯 번 대국을 통해 이 9단이 얻은 건 더 많다. 아마 바둑기사보다는 인간으로서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3국까지 잇달아 패하면서 인간계는 패배감이 팽배했다. '이세돌의 패배'를 얘기했고, 더 나아가 '바둑의 패배' 그리고 '인간의 패배'란 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이세돌 만은 "나의 패배이지 인간의 패배는 아니다"고 반발했다. 절망감만 남고 인공지능이 승리할 것 같았던 세기의 대결은 4국에서 '인간의 대반격'으로 모든 게 달라졌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이세돌 9단의 모습에 사람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고 가슴 먹먹한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첫 승을 거뒀을 때 보여줬던 이세돌의 그 해맑은 웃음에 더 눈물이 났다.

한국 바둑 1인자의 계보를 만든 천재들.

한국 바둑계는 다른 스포츠처럼 주로 한사람의 천재적 스타를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한국바둑의 아버지라 불리며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약 20년 간 1인자로 군림하던 조남철은 자신보다 스무 살 아래인 김인에게 1인자의 자리를 물려줬다.

김인은 그로부터 약 10년 뒤 열 살 아래인 조훈현에게 물려준다.조훈현이 독식하던 20여 년의 세월 동안 동갑내기 서봉수가 끈질기게 왕좌를 넘봤지만 바둑황제 아성은 그의 제자 이창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조훈현의 것이었다. 조훈현에게 서봉수가 있었다면 이창호에게는 유창혁이 있었다. 이들 2인자들이 때때로 국내기전에서 1인자를 꺾거나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지만, 1인자 타이틀을 얻진 못했다.

이창호의 왕좌를 물려받은 인물은 이세돌이었다.

이처럼 한국 바둑계에 춘추전국시대는 없었다. 1인자들은 다음 세대의 왕이 나타날 때까지 굳건히 왕위를 지키고 있다가 오직 왕이 될 인물에게만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한편, 이세돌의 나이 올해로 만32세로 작년에는 중국의 구리 9단과 역사적 10번기에서 승리하면서 연간 상금 최고 기록을 갱신하였고, 2013년 말까지 수년 간 랭킹 1위를 지켰으며 현재도 박정환, 김지석에 이어 랭킹 3위이다.

한국에 바둑이 전래된 것은 고조선 말기 전후로 보고 있다. 특히 기자 전래설과 한사군 전래설 이 2가지 주장이 가장 유력하다. 기자 전래설은 중국 은나라 말 기자가 약 5천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는데, 이들 무리 중 바둑에 뛰어난 자에 의해 한국에 전해졌을 것이라는 견해다. 한사군 전래설은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중국의 문물이 함께 들어왔는데, 이 과정에서 바둑도 함께 전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주장이다. 특히 기자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학자들은 한사군 전래설이 더 유력하다고 피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사를 통한 한국의 바둑 기원을 찾을수는 없는 걸까?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장수왕시절 당시 바둑의 고수로 알려진 승려 도림이 장수왕의 명을 받아 백제 개로왕에게 바둑을 통해 접근했다는 기록이 있어 최소한 고구려 장수왕 이전에 바둑이 전래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효성왕(제34대 왕, 재위 737∼742)과 신충이 바둑을 두며 우정을 맹세한 일화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8세기 이전 신라에 보급되었고, 그 이전에 고구려와 백제에 성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많은 왕들이 바둑을 즐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들이 바둑을 두었던 기록은 실록에 약 380여건, 승정원 일기에도 280여건에 이른다. 특히 세조는 숙위장군을 수시로 불러 활을 걸고 바둑을 자주 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 바둑기원은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그 중 몇 가지만 살펴보면, "천체관측설과 요순 창시설이다. 천체관측설은 별자리 관측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별자리 관측을 통해 제례의식과 길흉화복을 점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견해다. 그리고 요순창시설은 중국 요황제의 아들 단주와 순황제의 아들 상균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주기 위해 개발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현대 바둑의 기초가 확립된 것은 "우칭위엔(吳淸源)에 의해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 듯 하다. 우칭위엔은 20세기 최고의 기사로 손꼽히는데, 본래 1914년 중국 푸젠성에서 태어난 중국인이다. 그는 14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문하에서 입문하여 1929년 3난에 올랐고, 1984년 9단으로 은퇴하였다. 그가 현대 바둑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평가 받는 이유는 1934년 '기타니 미노루'와 함께 '신포석법'을 창안하여 지금의 바둑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기타니 미노루, 사카다 에이오, 다카가와 가쿠 등을 연파하여 1인자에 올라섰다. 따라서 혼인보 도사쿠, 슈사쿠와 함께 3대 기성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기타니 미노루(木谷實)'를 짚고 넘어가자. "기타니 미노루는 1909년 효고현에서 태어나 1921년 '스즈키(鈴木爲次郞)' 문하에 입문하였다. 1924년 초단을 시작으로 앞서 언급한 우칭위엔과 함께 신포석을 제창하였고, 이후 극단적인 실리 기풍으로 전향하였다. 또한 '기타니 도장'을 세워 오타케 히데오, 가토 마사오, 조치훈, 다케미야 마사키, 고바야시 고이치 등을" 배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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